에콰도르 사회 불안에 희수 앞두고 다시 가기로 결심…"작은 일부터 하겠다"
1979년에 스페인어 2∼3개월 배우고 홀로 부임…선교·의료·사회복지 활동
김용숙 선교사와 에콰도르에서 함께 한 교리 교사 |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병원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상태가 심각했어요. 예를 들면 수술방은 완전히 소독된 상태여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그런 곳에서 (수술)해도 완쾌되는 분들이 있었죠."
에콰도르를 비롯해 남미에서 가톨릭 평신도 선교사로 37년간 활동한 김용숙(76·세례명 엘리사벳) 씨는 그가 경험한 현지의 열악한 의료 상황을 이렇게 돌아봤다.
한국 의사들이 보면 깜짝 놀랄 수준이었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에콰도르 국민들의 모습에서 삶의 다양함과 역동성을 몸소 느꼈다고 한다.
한국 외방 선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이해 한국 천주교가 올해를 해외 선교 50주년으로 기념하는 것을 계기로 전화로 김씨의 남미 선교 경험을 들어봤다.
"1979년 12월 3일 에콰도르에 도착했어요. 저에게 너무 큰 변화가 생긴 날이라서 지금도 그 날짜를 기억하고 있어요."
김용숙 씨와 교리 교사들 |
김씨는 그로부터 35년여가 지난 2015년 1월 무렵까지 에콰도르에서 선교사로 활동했고 2016∼2018년 사이에 1년 7개월가량 역시 선교사로 남미 볼리비아에 머물렀다.
중간에 모금 등을 하려고 일시 귀국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살아온 날의 절반 정도를 남미에서 사제의 사목활동을 돕거나 주민의 생활 향상을 위해 헌신한 것이다.
1949년생인 김씨는 광주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맏딸로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학원에서 간호사 일을 배우고 스위스로 해외 취업을 떠났다. 3년간의 외국 생활이 그에게 인생에 대한 많은 의문을 던졌다고 한다. 20대 초반부터 성당에 다닌 경험 때문인지 가톨릭 신앙은 김씨의 삶에서 새로운 나침반이 됐다.
에콰도르에 개원한 의료시설 |
김씨는 스위스 생활을 마친 후 프랑스에서 2∼3년가량 성소 생활을 하며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교사로서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안전하게 아기를 낳을 장소를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멀리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콜레라나 장티푸스에 걸린 이들을 포함해 온갖 환자가 다 모여들었어요. 나중에는 공간이 부족해서 복도에까지 환자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죠."
에콰도르의 의료시설 |
폭발적인 의료 수요에 힘입어 내과나 정형외과도 개설하고 병원은 점점 커졌다.
김씨는 청각 장애로 인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숨어 사는 장애인을 만나게 되면서 이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도 함께 했다.
의료 기반 열악했던 에콰도르 |
김씨는 일련의 활동이 자신의 공적으로 평가될 것을 우려했다.
"제가 혼자 한 것은 결코 아니에요. 제가 속한 본당 신부님과 동네 사람들, 마을 유지 등과 어떻게 할지 상의했고 함께 결정했어요. 운영 역시 그분들이 도와줬습니다. 저는 그들 중 한명으로 일했을 뿐입니다."
선교사로 떠나기 위해 그는 어떤 준비를 했을까. 성소 생활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고난을 극복하는 큰 힘이 됐다고 김씨는 전했다.
장애인 시설 기금 마련 위한 로데오 행사 |
문제는 언어였다. 2∼3개월 정도 기초 스페인어만 배우고 에콰도르로 떠난 것이다. 김씨는 "내가 언어(학습)에 굉장히 둔하다. 주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생활 용어를 쓰고 그냥 질서 없이 배웠기 때문에 내 스페인어는 엉터리"라며 맑게 웃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커녕 유선전화도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시절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으로 서른 살 여성이 홀로 뛰어들려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그때는 제가 아직 젊었죠. 어떤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인지 생각을 안 했어요. 열성은 있었지만 앞을 재보지는 못했죠."
김씨는 "먹을 것 있으면 나눠 먹고, 어려운 일에 다 같이 대처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정이 들었다"며 "언어 때문에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그런대로 넘어간 것 같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김용숙 씨와 대나무로 지은 성당 |
그는 "가서 살아보니 사람은 말이 서툴러도 마음과 마음으로도 통한다"며 "어려운 때도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과 살면서 제가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다"고 남미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을 향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치안이 불안해도 김씨는 늘 보호받고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저의 친구가 되고 폭력적인 무리도 우리가 자기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고 선의로 대해줬어요. 불완전한 사회지만 그 동네에서 항상 보호받았어요."
김씨는 나이가 들어 건강 상태가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면서 귀국했고 현재는 전남 담양군에서 지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다시 에콰도르로 가기로 결심했다. 사회불안이 심각해지면서 교도소에서 폭동이 일어나거나 총격 사건이 벌어지는 등 치안이 흔들리고 있다. 올해 6월 에콰도르에 갔다가 과거에 인연을 맺은 이들이 어려움에 부닥쳤다는 소식을 접한 김씨는 홀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의료시설 옥상에서 장애아동 돌봄 활동 |
"에콰도르는 마약, 알코올 중독, 에이즈, 범죄 등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됐어요. 제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님과 동생이 살해당했는데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마땅하지 않은 친구도 있어요."
희수(喜壽·77세)를 바라보는 그가 이런 결심을 하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김씨는 "내가 나이도 많고 그래서 '경솔한 짓인지 모르겠지만 좀 돕고 싶다'고 했더니 상상외로 주위에서도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에는 단신이 아니다. 과거 에콰도르에서 알게 돼 우정을 쌓은 다른 선교사와 함께 내년 봄 함께 여정에 나선다. 과야스주의 주도인 과야킬에 가서 9개 의료기관이 모인 가톨릭계 연합체를 근거지로 삼아 "조그마한 일부터" 시작해볼 계획이다.
에콰도르 아이들과 함께한 김용숙 선교사 |
김씨의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성직자는 아니지만 평신도로서 교회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도직 협조자로서의 삶을 자신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저는 사도직 협조자로서 사도적 봉사와 복음정신으로, 하느님 사랑이 온 세상에 전달되도록 충실한 도구로 살고자 합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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