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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1 (수)

    이슈 하마스·이스라엘 무력충돌

    美 유대교 회당의 인질 테러범, 한국계 여성 수석과 통화 원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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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센트럴 회당의 수석 랍비 안젤라 부흐달, 2022년 테러범과 통화하며 시간 벌어

    인생 대부분 유대 공동체에서 ‘이방인’ 감정 느꼈는데

    범인은 “테러범 석방하라”며 유대인의 영향력을 그에게 요구

    애틀랜틱 몬슬리에 자서전 ‘이방인의 마음’ 요약 소개

    2022년 1월 15일 오전 10시쯤, 미국 텍사스주 콜리빌에 위치한 한 작은 유대교 회당에 44세의 파키스탄계 영국인이 총을 들고 들어가 당시 안식일 예배에 참석 중이던 교인 4명을 인질로 잡았다. 그는 뉴욕시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센트럴 회당(Central Synagogue)의 수석 랍비인 한국계 여성 안젤라 부흐달(Angel Buchdahlㆍ당시 49세)과의 통화를 원했다.

    곧 부흐달 랍비의 스마트폰에 갑자기 텍사스 발신(發信)의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떴다. “랍비! 범인은 총을 가졌고, 폭탄도 갖고 있대요(Rabbi. Guman. Says he has bombs).” 인질로 잡힌 텍사스 유대교 회당의 랍비가 보낸 것이었다. 그 랍비는 인질 테러범이 부흐달 랍비와 통화를 원한다며 “결코 농담이 아니다”는 음성 메시지도 남겼다.

    한국계 여성인 안젤라 부흐달은 2014년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인 맨해튼 센트럴 회당의 수석 랍비가 됐다. 유대교의 ‘유리 천장’을 깬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으로 당시 미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그의 아버지는 개혁 유대교 랍비였고,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만나 결혼했다

    부흐달 랍비는 2013,2014년 미국의 여러 매체에서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랍비 50인에 포함됐다. 유대계 매체 ‘포워드(The Forward)’는 미국에 영향을 미친 유대인 5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안젤라 부흐달은 2014년 오바마 행정부의 하누카(수전절) 백악관 행사에 초대해 찬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아침 부흐달 랍비는 테러범이 자신을 찾는다는 메시지에, 어리둥절했다고 말했다. 1972년생인 그는 성장기 미국에서 유대교 회당을 다니면서도 줄곧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인생의 대부분 자신이 ‘유대인’이고, 제대로 된 랍비임을 상대방에게 설득해야 했다. 그런데 이날 테러범은 부흐달을 ‘랍비들의 랍비’로 여기며 그와 통화하기를 원했다.

    테러범은 왜 부흐달을 택했을까. 부흐달 랍비는 그날 그가 겪었던 일과, 한국계 여성으로 유대공동체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느꼈던 경험을 곧 출간되는 자서전 ‘이방인의 마음(Heart of A Stranger)’에 담았고, 축약본을 미 월간지 애틀랜틱 몬슬리 웹사이트에 12일 게재했다.

    조선일보

    뉴욕 센트럴 유대교 회당의 안젤라 부흐달 수석 랍비가 쓴 자서전 Heart of a Stranger 표지. 그는 이 책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유대 공동체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지만, 이방인으로 사는 경험을 이해할 때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배우게 된다"고 썼다.


    ◇범인은 정확히 그를 알고 통화를 원했다

    부흐달 랍비는 이날 아침 ‘통화 금지’라는 안식일 룰을 깨고, 코로나에 걸린 아버지에게 전화해 증세를 묻고 있었다. 통화 도중에, 낯선 번호에서 온 문자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급히 통화를 끊고, 녹음된 메시지를 재생했다. “저는 텍사스주 콜리빌에 있는 베스 이스라엘 회당의 찰리 사이트론-워커 랍비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진짜 건맨(gunman)이 있고, 당신과 통화를 원합니다. 전화 주시겠습니까?”

    아직 이 유대교 회당의 인질극 사태가 보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편 야곱과 함께 텍사스의 그 회당으로 전화하며, 동시에 911에도 연락했다.

    세 번째 시도 끝에 테러범과 통화가 됐다. 그는 부흐달 랍비에게 “당신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는 경고를 되풀이했다. ‘임무’를 위해 영국에서 왔다는 그는 ‘미국 최고의 랍비’를 찾고 있었고, 부흐달 랍비를 거기에 가장 근접한 사람으로 판단한 듯 했다. “당신은 영향력 있는 랍비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인생 대부분 “나는 유대인이고 ‘진짜’ 랍비”라고 설득해야 했던 삶

    그러나 왜 자신과 통화를 원했을까.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해서 붙여진 ‘센트럴’이란 유대교 회당 이름이, 범인이 잘 알 법한 런던의 저명한 센트럴 이슬람 사원(mosque)만큼이나 ‘중앙’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인질 4명의 목숨을 붙잡고 있는 범인의 통화 요청은 부흐달 랍비에게 ‘저주’에 가까웠다.

    부흐달은 ‘아이러니’를 느꼈다고 했다. 미국의 진보적인 개혁 유대교는 1970년대 들어서야 종교적 배경이 다른 가정들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늘 “절반짜리 유대인은 없다. 너는 100% 유대인이고, 100% 한국인이고, 100% 미국인이야. 너는 그 모든 것”이라고 했지만, 부흐만 랍비는 어린 시절 유대교 회당을 다니면서도 그렇게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청소년 시절 유대 음악에 심취하고, 예지력 깊은 탈무드의 문장과 질문들을 접하며 ‘수천 년 그들은 어떻게 알았지’라고 감탄했고, 곧 평생 이 깊은 대화에 몰입하는 게 일인 랍비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교 율법은 여전히 모계(母系)로 유대인을 정의했고, 개혁파 유대인도 그의 외모를 보고선 ‘어떻게 진짜 유대인일 수 있느냐’고 했다. 이스라엘 유학 시절, 이스라엘인 친구는 ‘개종(改宗)하면 된다’고 위로를 했지만, 이미 평생 유대인이었던 부흐달에게 ‘개종’이란 말은 모욕이었다.

    ‘유대인이길 그만 두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어머니는 “그게 가능하니”라고 물었다. 그리고 부흐달도 자신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이미 뼛속까지 유대인이고, 한국인ㆍ여성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도 그만 둘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석 랍비가 된 이후에도, 부흐달은 ‘소속감의 경계’를 느꼈다.

    ◇테러범은 “여성적 감각”이 필요했다

    범인은 통화에서 부흐달에게 “당신은 파워 있는 사람이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한 사진도 봤고,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도 봤소. 내가 필요한 것은 여성적인 감각(touch)”이라고 했다.

    범인은 그에게 미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아피아 시디키라는 여성 신경과학자를 석방시키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요구했다. 시디키는 MIT 박사로, 자유의여신상을 파괴하고 미군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2010년에 86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미 언론에선 ‘레이디 알-카에다(Lady Al Qaeda)’라고 불렀다.

    부흐달 랍비는 “바로 (구출 노력을) 하겠다”고 거짓으로 답하며 시간을 벌었다. 요구 조건은 터무니없었지만 아이들의 목숨까지 붙잡고 있는 범인을 최대한 설득해야 했다.

    범인은 두번째 전화에서 “나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고, 당신은 시간이 없다”고 협박했다. 부흐달로선 테러범에게 자신이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 있으리라고 믿게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나중에 CBS 뉴스 인터뷰에서 “이미 수사 당국에 얘기를 했고, 그저 기다리며 기도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범인은 수석 랍비인 부흐달이 자신의 요구 조건을 들어 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은 영향력이 있고, 당신은 더욱 그렇다”고 했다. 두번째 전화에서 범인은 “한 시간 주겠다”고 했다. 부흐달은 전화를 끊은 뒤, 자신의 실수가 자칫하면 인질 구조 작전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는 책임감과 무기력감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썼다.

    이제 인질극은 생방송으로 미 전역으로 중계됐다. 이 사건은 연방수사국(FBI)의 테러대응팀이 개입하면서 11시간 만에 해결됐다. 범인은 사살됐고, 인질은 모두 구출됐다.

    ◇낯선 범인에게 회당 유리문을 열어준 이유는

    인질로 잡혔던 텍사스주 콜리빌 유대교 회당의 사이트론-워커 랍비는 이날 오전 낯선 얼굴의 범인이 잠긴 유리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열어줬고 차를 대접했다.

    그러나 잠시 뒤 장전 소리가 들렸고, 인질극이 시작됐다. 장시간 대치 끝에 범인이 위치를 다시 잡으려고 잠시 총에서 손을 뗐을 때, 사이트론-워커 랍비는 범인에게 의자를 집어 던졌고 인질들에게 “도망가라”고 외쳤다. 곧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그는 나중에 인질로 잡혔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경찰과 유대교 단체들로부터 받았던 훈련이 도움이 됐다고 미국 언론에 말했다.

    그는 부흐달 랍비와의 대화에서 ‘방문자를 환영한 것은 옳은 행동’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는 토라의 여러 곳에 나오는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고 했다.

    ◇유대인의 정체성이 바로 ‘이방인’

    부흐달 랍비는 5000년 전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간 아브라함ㆍ사라 부부도 ‘이방인’이었다며, “지난 수년 간 나는 유대 공동체 안에서 ‘이방인’이라고 느꼈는데, 결국 ‘이방인으로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유대적인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썼다.

    그는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바벨론에서 뉴욕의 브루클린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방인’이었고, 이는 우리를 대변하는 모든 것의 배경이 됐다”고 썼다. 부흐달 랍비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경험을 이해할 때,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배우게 된다. 이방인의 마음을 이해하며 살 때, 그로부터 오는 뜻밖의 축복을 만나게 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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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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