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6 (토)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한글 보급 6년 만에 벽보·투서 횡행" 한글은 어떻게 성리학 질서를 깨뜨렸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글연대기' 낸 최경봉 교수 인터뷰

    한국일보

    '한글연대기'의 저자 최경봉 원광대 교수가 1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 교수는 한글의 위상은 세종대왕이 아닌, 이를 쓰는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면서 만들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서재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에다 쓰기를, '하 정승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1449년 10월 5일)

    1449년 가을 무렵, 도성 거리에 정승 하연을 비판하는 벽보 한 장이 나붙었다. 관청에서 한문으로 쓴 방이 아닌 백성으로 추정되는 이가 쓴 언문(한글) 벽보의 등장. 한글이 공론장의 언어로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글 창제 6년 만이었다. 최경봉 원광대 국문학과 교수는 신간 '한글연대기'에서 이 벽보의 상징적 의미에 주목한다. 15일 만난 최 교수는 "한글은 백성을 가르칠 글자이면서 백성이 자신의 뜻을 펴는 글자"였다며 "한글 벽보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공론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제목은 '한글연대기'지만 시간에 따른 사실을 단순 나열하는 책은 아니다. 최 교수는 "역사적 맥락을 배제한 채 한글의 위대함, 신성함을 강조하다 보니 세종대왕의 15세기 애민정신과 지금의 민주주의를 등치시키는 오류가 발생하고는 한다"며 "국문학자로서 한글이 쓰이고 변하는 맥락과 동인에 대해서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한국일보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국보 제70호 '훈민정음(1446년)'. 집현전 학자 정인지는 훈민정음해례본에서 한글을 똑똑한 자는 반나절이면 깨칠 수 있고, 우둔한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소개했다. 한글은 그 말대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본래 의도와 다르게 중세 질서를 깨뜨리고 근대 개혁을 추동하는 힘을 갖게 된다. 돌베개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 중인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46년)' 수정증보판. 돌베개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글은 중세 질서를 유지하려 만들었지만, 의도와 달리 중세 질서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사대부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던 말과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힘을 갖게 되자, 한글 벽보와 투서가 횡행한 것이다. 1485년 7월 '성종실록'엔 "언문 두 장을 가지고 들어와 아뢰었는데, 이는 곧 저자 사람이 판서와 참판을 비웃고 헐뜯는 말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세종은 한글이 삼강오륜의 이치를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 기대했겠지만, 한글은 삼강오륜의 이치에 반하는 지식과 사상조차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쉽고 간편한 글자였습니다. 한글이 담는 지식과 사상의 범위는 갈수록 넓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글의 진정한 힘을 목도할 수 있게 된 거죠." 책의 부제가 '훈민에서 계몽으로, 계몽에서 민주로'인 이유다. 조선시대 반역 사상이었던 기독교가 급격히 확산하는데도 '한글 성경'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최 교수는 짚는다.

    한국일보

    최경봉 원광대 교수가 1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자신의 저서인 '한글연대기'를 들고 미소 짓고 있다. 서재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은 이처럼 결국 언중의 생각과 선택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최 교수의 생각이다. "주시경 선생이 한글 전용을 주장했지만 안 됐거든요. 당시엔 이상론이었죠. 신문도 보면 국한문을 혼용하다가 한자 사용 비중이 점차 줄더니 1980년대부터는 제목이나 이름 외에는 한자를 잘 안 쓰게 됐어요. 선구자 한 명이 말과 글의 규범과 방향을 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비효율적이라는 거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대중의 선택이 모아지게 됩니다." 최 교수가 신조어와 외래어에 유연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예를 들어 사회가 혼탁하면 이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며 "특정 말을 쓰자, 말자, 재단하기보다는 여기서 드러나는 병리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게 우리 언어와 한글을 더 풍성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한글연대기·최경봉 지음·돌베개 발행·444쪽·2만5,000원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