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 구자하, 젤리·김치로 정체성 표현
개인 서사에서 출발해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
참여 퍼포먼스·영상·음악 더한 하이브리드 공연
구자하 작가의 연극 ‘하리보 김치’의 한 장면.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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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하듯 영원히 떠나 있는 상태로 끊임없는 상실감 속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리보 김치’ 중)
한국의 거리 어디에서나 보던 주황색 천막. 대문짝만한 간판이 걸려있지 않아도 한국인이라면 여기가 ‘포장마차’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바삭거리는 천을 열고 들어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말이다. 무대에 작은 포장마차가 열렸다. 천막을 스크린 삼아 서울의 밤거리가 펼쳐진다. 익숙한 골목,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오가는 곳. 어딘가에서 술 한 잔, 밥 한 끼에 피로를 풀어내곤 서둘러 제 갈 길로 가는 곳.
연극은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관객은 이미 무대로 몰입했다. 영상이 사라지자, ‘하리보 김치’의 작가이자 연출가이고, 주인공인 구자하가 등장해 포장마차 오픈 준비를 한다. 천막을 뜯어내는 손이 꽤 느려 답답함이 몰려오지만, 이상하게도 주인장의 손길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준비를 마치자, 객석의 관객 두 명이 손님으로 초대된다.
서우국제공연예술제에서 지난 19일까지 세 차례 선보인 ‘하리보 김치’는 구자하 작가의 네 번째 작품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구 작가는 전 세계 공연예술계가 주목하는 창작자다. 앞서 선보인 ‘롤링 앤 롤링’, ‘쿠쿠’, ‘한국 연극의 역사’는 이미 27개국에서 300회가 넘는 공연을 해왔다. 초기작 ‘롤링 앤 롤링’ 덕에 그는 벨기에에 소재한, 현대 공연계의 중추 역할을 하는 ‘캄포(CAMPO)’의 레지던스 아티스트가 됐다.
구자하 작가의 연극 ‘하리보 김치’의 한 장면.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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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구 작가의 무대에선 영어가 주 언어로 사용된다. ‘하리보 김치’는 작품 특성상 영어와 한국어가 적절히 버무려졌다.
‘하리보 김치’는 작가의 자전적 서사를 담아낸 ‘하이브리드 연극’이다. 배우가 여럿 등장해 주어진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전통적 연극의 방식과는 다르다. 다만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자 정치적 언어”라고 말하는 구 작가의 생각은 연극의 정체성과 맞닿아있다. 대신 형식에 차별점을 뒀다는 데에서 서구에선 그의 작품을 ‘하이브리드 연극’으로, 구 작가를 ‘씨어터 메이커’(극을 만드는 사람)라고 부른다. 무대엔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에 구 작가가 직접 만든 영상과 음악(사운드)이 더해진다.
제목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 두 음식인 하리보 젤리와 김치를 조합했다. 동서양의 만남이자, 초가공 식품과 자연 발효 식품의 조우다. 구 작가는 “한국인이라면 태어나기도 전부터 갖게 되는 음식 취향인 김치와 유럽에 건너가 살며 갖게 된 후천적 취향인 젤리로 나의 정체성을 들여다봤다”고 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한 인간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음식이라고 생각으로 만든 무대다.
70분의 무대는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유럽에 건너가 이방인으로 살며 겪는 정체성의 고민을 담았다. 극은 포장마차의 주인장이 두 명의 손님에게 김치전, 미역냉국, 버섯 튀김, 젤리 등의 음식을 내놓으며 그것과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1인 화자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방식이다. 이야기하는 동안 포장마차 양옆으로 세워진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작가가 직접 촬영한 기록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가사가 나오는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악을 통해 아기자기한 감각을 더했다. 다소 단조롭고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색깔과 정서를 입게 되는 장치들이다.
구자하 작가의 연극 ‘하리보 김치’의 한 장면.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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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명민하다.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해 한 사회의 역사이자 인문학, 인류학으로 확장하고 인간 보편의 정서를 포괄한다. 김치전을 만들며 꺼낸 이야기에서 한국을 떠나던 날 싸 들고 간 10㎏의 김치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에서 ‘김치 인문학’을 탐험하고, 미역냉국을 준비하며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피로는 한국의 역사 안에서 일찌감치 독일로 향했던 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버섯 튀김을 준비할 땐 닭튀김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엮어낸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세 캐릭터 고나(달팽이), 하리보(젤리), 장어 등은 작가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작가의 고민과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된다.
인종차별을 비롯해 이방인으로 겪는 고충과 외로움은 사실 지나치게 애틋해지기 쉽다. 하지만 ‘하리보 김치’는 결코 감정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다. 한국인도 유럽인도 아닌 경계인이자 이방인으로 놓인 자신의 상태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기보단 쿨하고 담백하게 조망한다. 구 작가는 그것을 ‘젤리니스’(Jelliness)라는 말로 설명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신조어다. 젤리처럼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쉽게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고 회복하는 능력이다. 10여 년의 이방인 생활을 하며 갖게 된 비유럽인의 생존 본능이자 회복력이다.
이야기는 미래지향적이다. 구 작가는 끊임없이 자기 서사를 통해 정체성을 탐구하며 궁극에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야기의 출발은 뿌리에서 비롯되나, 해답은 미래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어온 이방인으로의 경험과 정서를 ‘디아스포릭 스테이트(diasporic state)’라고 말했다. ‘하리보 김치’는 바로 이 상태에 대한 이야기다.
비단 구 작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온 삶을 살아내는 동안 누구도 자신의 목적지를 알지 못한다. 장소이든, 꿈이든, 생이든,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디아스포릭 스테이트’에 놓여있기에 ‘하리보 김치’는 동시대의 보편성을 입었다. 구 작가는 “초 단위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동시대성은 이미 옴과 동시에 가버리는 시간”이라며 “그 시간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곤 했다. 내 작업은 동시대를 위한 거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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