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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 (금)

    [강영운의 히코노미] 세상을 굴린 자동차의 왕 … 생산혁명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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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포드 컴퍼니에서 내놓은 '모델T'는 자동차 산업의 역사를 바꿨다. 왼쪽 사진은 1921년 헨리 포드가 '모델T'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포드사의 조립 라인. '포디즘'은 대량생산·표준화로 새로운 산업 시대를 열었다. 위키미디어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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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성미는 거칠고 메마르기 짝이 없어서, 제 편이 아닌 이들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정통 백인으로서 그는 오랜 편견에 기대 유대인을 혐오했고, 굴지의 경영인으로서 노동조합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겼다. 거친 생각은 전염성이 강한 탓에 그를 추종한 이들이 유대인을 학살하고, 노동조합에 총을 휘갈겼다.

    이처럼 좁고 편협한 사고가 역설적으로 혁신의 불쏘시개였다. "전 세계인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게 만들겠다"는 일념을 단 한순간도 내려놓지 않아서였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고, 생각을 바꾸지도 않았다. 독불장군이라는 힐난도, 꼴통이라는 멸칭에도 끄떡없었다. 럭셔리의 상징이었던 '자동차'를 세계인의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전 세계 산업의 자동화를 이끈 남자. 헨리 포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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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의 세계로 들어간 가난한 소년

    1863년 헨리 포드는 미국 미시간에서 남루한 유럽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자들의 운명은 대개 가엽기 짝이 없어서 그의 어머니는 그가 고작 여덟 살일 때 세상을 떴다. 곰살맞은 데라곤 한 치도 없는 아버지와 교감이 있을 리 없었기에 포드는 주로 기계와 대화를 나눴다.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 시곗바늘의 재깍거림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변덕 없이 항상 그 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관성'에 매력을 느낀 것이었다. 장난감이라곤 시계 하나뿐이었던 포드는 시계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객쩍은 일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에겐 누구보다 재밌는 일이었다.

    포드의 입가 나룻이 무성해질 무렵 아버지 윌리엄 포드가 그에게 농장 일을 맡기려 하자 그는 도시로 달음질쳐버렸다. 농장 일은 그가 가장 원하지 않던 일이어서였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은 디트로이트. 기계의 도시로 불리는 곳이었다. 기계를 만지는 재능은 천부적이어서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도 일자리를 갖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몇 년 후에는 에디슨 조명 회사의 엔지니어로 적을 옮겼다.

    19세기는 기계의 시대였다. 철과 증기기관이 인간의 힘줄과 말의 근육을 대신하던 시대였다. 철마가 말의 자리를 빼앗자 사람들의 관심은 개인용 자동차로 향했다. 말보다 강한 힘으로, 말보다 멀리, 말보다 안전하게 이송하는 자동차의 개발이 절실했다. 그는 '자동차'가 불러올 세계적 파장을 예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자신의 자동차로 채우고 싶었다. 1896년 그가 첫 자동차를 완성했다. '포드 쿼드리사이클'이라 불린 미국의 첫 번째 자동차였다.

    자동차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최고라 여겼기에, 더 이상 에디슨의 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엿한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고 싶었다. 사업 밑천을 대겠다는 전주(錢主)도 많았다. 디트로이트오토모빌컴퍼니(DAC)의 설립이었다.

    하지만 '발명'과 '사업'은 축구와 농구만큼이나 다른 영역이라는 걸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개발한 자동차는 발명품으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었지만, 세간살이로는 전혀 긴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비싼 놀이기구를 애써 집에 들여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DAC는 역사의 뒤란으로 사라졌고, 포드는 희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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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적 분업 '포디즘'의 탄생

    포드의 마음을 녹인 건, 자동차의 엔진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였다. 포드가 좌절에 빠진 이듬해 디트로이트에서 자동차 경주 대회가 열렸다. 8㎞를 가장 빨리 달리는 자동차에 막대한 상금이 떨어지는 경주. 포드의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졌다. DAC에서 함께 일하던 엔지니어들과 의기투합했다. 레이서로는 당대 최고의 자전거 레이서 바니 올드필드를 섭외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자전거 레이서를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동차를 믿어서였다.

    당대 가장 빠른 기차에 붙은 '999'의 이름을 빌려 '포드 999'로 이름 지었다. 디트로이트 대회에서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건 포드 999였다. 포드 999의 사진이 전 언론에 도배됐다. 헨리 포드의 열정에 다시 시동이 걸렸고, 그해 그는 '포드컴퍼니'를 다시 세웠다.

    첫 사업에서의 실패를 포드는 누차 곱씹었다. 자동차가 그저 부호의 장난감이어서는 곤란했다. 값비싼 장난감으로도 제법 돈은 만질 테지만, 포드의 야망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포드는 모든 미국인이 포드 자동차를 모는 생각으로 충만했다.

    생산 현장을 다시 살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드는 구조를 그는 뒤집어 생각했다. 부품을 조이는 노동자는 부품만 조이고, 기름칠하는 노동자는 기름칠만 하며, 마감을 보는 노동자는 마감만 보는 극단적 '분업화'였다. 인간을 기계처럼 부려야 생산량이 터질 것이었다. 후대 학자들이 '포디즘'이라고 부르는 대량생산 시스템이었다. 극단적 효율성의 조립 공정에서 '모델T'가 태어났다. 가격은 850달러. 2000달러에 달하는 캐딜락 대비 절반도 안 되는 '염가 중 염가'였다.

    이조차도 포드의 눈에는 만족스럽지 않은 가격이었다. 미국 일반 근로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가격이어서였다. 포드는 생산 설비의 효율성을 채근했고, 더 많은 생산량을 독촉했다. 한 대당 조립 시간이 12시간에서 93분으로 줄었다. 모델T의 가격은 매해 내려갔다. 1925년에는 250달러까지 떨어뜨렸다. 근로자 월급의 세 달 치에 불과했다. 한 해 생산량이 1만대에서 200만대로 늘었다.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포드는 그냥 자동차가 아니었다. 미국의 발이었고, 미국의 자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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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투 선수를 관리자로 채용한 포드

    싸고 좋은 모델로만 경쟁자를 괴롭힌 게 아니었다. 포드는 노동시장의 저임금 '질서'도 교란했다. 포드는 '일당 5달러'를 선언했는데, 경쟁사 대비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여기에 주5일 40시간 근무제까지 얹었다. 포드는 경영의 눈썰미가 남달라서 임금과 근로 환경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보는 선구안이 있었다.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디트로이트 최고의 정비사들이 포드사 앞에 줄을 섰다. 경쟁사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임금으로 양질의 인재를 챘다. 포드의 자동차 보디에 윤이 났고, 엔진은 짐승이 포효하듯 울부짖었다.

    그 대신 포드는 준 만큼 받기를 바랐다. 근로자들이 일대일로 테이블에 앉아 요구 사항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걸 그는 극도로 혐오했다. 근로자는 고용주가 부리는 사람들이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는 게 포드의 굳은 생각이었다. 1920년대의 시대정신이 마르크스주의라는 걸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노동자들의 연대는 억센 실이 돼 포드의 목을 조여왔다. 연이은 파업이 포드를 덮쳤다.

    포드는 해리 베넷을 노동 관리 전담자로 고용했다. 해군 출신의 권투선수였다. 충성스러운 만큼이나 폭력적인 인물이었다. 한 기자가 베넷을 만나 물었다. "포드가 내일 하늘을 검게 칠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일이면 선글라스를 쓴 10만명의 노동자가 공장 정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포드는 베넷에게 디테일을 주문하지 않았다. 근로자들의 파업 현장을 가리키며 '관리하라'는 한마디만 던졌다. 파업 현장에 깡패들이 도열했다. 곤봉으로 근로자들을 후려쳤고, 이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총을 꺼냈다. 파업 현장에서 다섯 명의 노동자가 세상을 등졌다.

    히틀러 집무실에 걸려있던 포드 초상화

    "이민 문제도, 돈 문제도, 국제정치의 현 교착상태도, 영화 연극의 음란화도, 밀주와 마약 사업에도 그 근원에는 유대인이 있다."

    포드는 외골수인 만큼 오랜 편견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었다. 이성적 조언엔 눈을 감았고, 음모론에 귀가 팔랑거렸다. 특히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허언을 포드는 굳게 믿었다. 헛소문을 믿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경영계 거물의 믿음은 그 파장이 달랐다.

    포드는 본인이 소유한 언론 '디어본인디펜던트'에 유대인을 비난하는 글을 꾸준히 썼다. 이를 엮어 '국제 유대인: 세계의 문제'라는 책을 펴냈다. 이를 여러 차례 곱씹어 읽고, 소화했던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1931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헨리 포드를 영감의 원천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의 집무실에는 포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히틀러는 포드의 생각만큼이나 경영 능력을 닮고 싶어서 '독일판 모델T'를 만들고자 했다. 폭스바겐 비틀이 태어난 배경이었다. 저렴한 국민차의 등장에 독일 국민은 열광했고, 히틀러는 그 지지를 무기 삼아 유대인을 학살했다. 포드는 후에 반유대주의를 철회했으나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혁신의 물성은 기체와 같아서 포드의 생산 시스템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은 통조림 공장에, 옷 공장에, 철강 공장에, 벽돌 공장에 번졌다. 미국의 생산력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세계 어떤 나라도 미국의 생산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극단적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는 것이어서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포드를 신으로 모시는 세계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멋진 신세계'에서 BC(기원전)·AD(기원후)라는 연대 표기법 대신 AF를 사용하는데, 이는 포드 탄생 후(After Ford)라는 뜻이었다.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부작용에도 미국의 동맹국도, 우방국도, 심지어 적대국까지 미국의 시스템을 베끼기 바빴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포드는 포드사를 '민주주의의 병기창'으로 전환했다. 항공기 부품을 대량생산해 조국의 승리를 도왔다. 포드의 조악한 생각은 적국 독일에서 살육의 지옥도를 그렸지만, 그의 경영 혁신은 자본주의의 풍요로운 들로 인류를 안내했다. 미국은 이 범접할 수 없는 경제 시스템을 무기로 세계의 질서를 새로 세웠다.

    인류의 삶에 기름칠을 한 사나이

    포드는 아집으로 성공한 인물이어서 죽을 때까지 고집을 놓지 않았다. 아들 에드셀 포드가 경영 일선에 나온 이후에도 건건이 참견과 몽니를 부렸다. 에드셀은 포드사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킨 주인공이었지만, 아버지의 간섭에 건강이 악화돼 1943년 4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포드는 노조를 박살 내는 데 일인자인 베넷을 대표로 세우려 했다. 시대의 공기를 읽지 못하는 포드의 우둔함에 가족들은 기함했고, 그의 일가는 자신들의 손으로 포드를 '포드사'로부터 내쳤다. 손자 헨리 포드 2세가 경영을 물려받았다. 포드와 포드사는 굳게 엉겨 붙어서 둘을 떼어놓자 포드의 몸과 마음에 녹이 슬었다. 오래된 엔진처럼 그의 심장은 쇠잔해졌다.

    은퇴 후 2년이 채 되지 않은 1947년 4월, 헨리 포드가 뇌출혈로 죽었다. 외곬으로 자동차에 미쳤고, 그 광기로 세계를 바퀴 위에 올려놓은 남자의 죽음은 초라했다. 자동차를 발명한 건 그가 아니었으나, 자동차를 세계인의 품으로 안긴 건 그의 공이었다. 자본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려 인류의 삶에 기름칠을 한 사나이, 헨리 포드. 자본주의 질서는 도덕군자가 아닌, 한 산업에 미친 자들이 만든 풍유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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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운 기자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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