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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나에게 한 자락의 휴식을… 당신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방법, 음식ㆍ커피ㆍ음악ㆍ스포츠 전문가가 발 빠르게 배달한다.가수 백년설의 '백년설 애창곡집'.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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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일보 애독자다. 매일 신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최근 수 십년간의 루틴이 깨진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변치 않을 동맹으로 여겨졌던 미국은 물론이고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과의 관계가 낯설게 느껴진다. 그 때문일까. 한국인 대부분은 아는 노래지만, 대부분은 들어보지 못했을 가사가 마음에 와닿는다. 바로 백년설 '나그네 설움'의 3절 가사다.
"낯익은 거리다 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외교안보 지형이 삽시간에 바뀌면서, 정신 차리고 헤쳐 나가야 할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사실 이 노래의 가사는 1940년 일제강점기의 정서를 담고 있다. '나그네 설움'은 왜경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백년설이 광화문의 경시청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밤 11시에 풀려나와 선술집에서 끄적인 낙서로 만들어졌다. 전차도 끊기는 시간인데 작사가 조경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까지 대폿잔을 기울이며 백년설은 그날 밤의 소회를 "새벽 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 소냐"라고 끄적였다. 조경환도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의 1절 가사를 쓰고, 작곡가 이재호가 그 낙서에 곡을 붙였다.
백년설의 본명은 이창민이다. 191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성주 농고와 한양 부기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희곡 작가가 꿈이었으나 1939년 연습 삼아 노래한 ‘유랑극단’이 히트하면서 가수의 길을 걸었다.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고향설' 등 그의 노래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잃어버린 조국(祖國)을 주막, 대지, 항구, 고향, 옛 님 등으로 은유해 왜경의 눈을 피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피난지 대구에서 목재소, 고아원, 레코드사를 운영했으나 경영난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도 이중섭, 구상 등 문인들의 방을 마련하고 다과까지 챙기는 사람이었다. 1960년 가수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지내고 1963년 7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은퇴 공연을 갖고 24년의 가수 생활을 접었다. "덧없는 세월 속에 노래만 남기고, 이 백년설이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는 고별사에 관중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1967년~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 지사장을 지내고 197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족 이민을 갔다.
그 1년 뒤 1980년 12월 6일 66세를 일기로 이국에서 운명했다. '한강'의 가수였던 부인 심연옥은 4년 전 작고했다. 노태우 정부 내무장관이었던 백년설 추모사업회 이상희 회장이 '오늘도 걷는다마는'이란 전기를 발간하고, 고향 성주의 성밖숲과 성주고 교정에는 '나그네 설움'의 노래비가 애달픈 시절을 추억한다. 하지만 아직도 동아시아와 그 너머 지구 도처에선 '나그네 설움'의 정서를 실감케 한다. 백년설은 한 시대 조국의 설움을 노래한 나그네였다.
신대남 한국대중문화예술 평론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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