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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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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은 "실학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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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세상]
    강명관 '홍대용 평전'


    한국일보

    '일하제금집'에 실린 홍대용 초상. 중국 연행 시에 청나라 학자인 엄성이 직접 그렸다.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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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

    담헌 홍대용(1731~1783) 이름 앞에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다. 신분제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중화도 없고, 오랑캐도 없다"며 화이론을 부정했던 인물은 지금껏 개혁가로 묘사됐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신간 '홍대용 평전'에서 기존의 평가를 철저히 깨부순다. 1, 2권을 합해 1,300쪽이 넘는 대작을 통해, 홍대용이 실학자가 아니라 실천을 강조한 성리학자, 정주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의산문답' '임하경륜' 등 홍대용이 남기거나 그가 언급된 모든 사료를 샅샅히 훑어 담헌의 진면목을 입증한다.

    강 교수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는 홍대용이 남긴 텍스트 중에서 필요한 자료만 골라내 조합한 뒤 개혁적 인물로 만들어냈다"며 "천문학, 수학, 문학 등 각각 이뤄진 기존 연구 대신, 이 사람의 삶의 궤적 위에서 인물의 생각과 발언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나오게 됐는지, 전체사를 그려보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홍대용이 실학자? 백성 거주 이전 자유 제한 주장


    기존 역사가들은 홍대용을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 평가한다. 이는 그의 저술인 '임하경륜'에서 놀고 먹는 유식 사족을 비판한 대목에서 비롯됐다. 담헌은 여기에서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그 재능과 능력에 따라 적합한 직업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평등 의식의 발현이라기보다, 유의유식하는 자는 국가가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이를 죄악시하기 때문이었다. 이 발언이 신분제 철폐로 해석되는 것은 과도하다고 강 교수는 지적한다.

    강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홍대용은 자신이 가진 사회경제적 기반을 허물겠다는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울의 경화세족으로 상위 0.01%의 최상류층이었다. 평생 노비를 거느린 지주였으며 음직으로 벼슬을 살았다. 그가 사회질서에 순응했을 뿐이라고 보기 힘든 대목도 많다. 영천 군수로 있을 땐 구제미인 진휼곡을 착복하고 그것을 다시 군민에게 빌려줘 갑절로 받아내려 했다. 같은 책(임하경륜)에서 백성의 거주 이전을 금하고, 필요 이상의 소비를 엄격하게 금하는 통제 사회를 이상 사회로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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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용 평전'의 저자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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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론을 부정한 데도 개인적 동기가 있었다고 본다. 몇몇 사대부가 홍대용이 청나라에서 사귄 중국인 벗 엄성, 반정균 등을 '명에 대한 충절 의식도 없이 오랑캐 조정에 벼슬하고자 하는 비루한 자'로 몰아가자, 이들과의 친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화이의 구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부정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징표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홍대용의 천문학적 식견도 한계가 뚜렷했다. "관측으로 얻은 수치와 수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정주학 기론에 입각한) 상상력의 확장에 의한 것"이어서다. 그가 제작한 '혼천의'도 천체 관측기가 아니라, 중국 고대에 만들어진 우주관 '혼천설'을 형상화한 천체 모형이었다. 무엇보다 화이론 부정과 지구 자전설이 담긴 '의산문답'은 인쇄되지 않았고, 필사본으로 단 3명만이 가지고 있어 당시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했다.

    조선시대 실학, "역사적 리얼리티 다시 봐야"


    홍대용은 생애 마지막까지 굳건한 성리학 질서 안에서 살았다. 정조와의 대화에서 "진시황이 잡서를 태우지 않았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제자백가의 말들이 한갓 이목만 어지럽혔을 뿐이니, 태운들 무슨 해가 될 것이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런 그가 어쩌다 개혁가, 실학자로 둔갑했을까. 20세기 역사가들의 곡해, 그리고 오독이 이어진 결과라고 강 교수는 말한다. "일제 식민사관에 반박하고자 조선 후기부터 '자생적 근대화'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우리가 이미 자본주의적 근대에 깊이 도달한 지금, 굳이 과거를 비틀어가며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학자로 무리하게 설정하는 것이 당대의 현실과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배금주의, 환경 파괴로 대변되는 근대적 자본주의가 역사적 필연, 즉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 마땅하다는 가치 판단을 내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번 책이 "실학을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학을 해체해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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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용 평전 전 2권·강명관 지음·푸른역사 발행·784쪽, 584쪽·4만9,000원, 3만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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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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