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산문집 '그간 격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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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김자야 여사가 이동순 시인에게 보낸 자필 편지. 창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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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글월 반갑고 고맙습니다. 편지마다 자야로 불러주시니 함흥에서 편지를 받는 것만 같고 평양에서 온 편지인가 새삼스러운 착각을 일으켜 서먹해지는구려. 무슨 인연으로 늙마에 그 어여쁜 이름을 들으니 참으로 세상사는 예측이 불허이니 그 이름을 지어준 본인이 뛰어올지 달려갈지 그날이 올지, 자야 원래 본인의 심정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백석(1912~1996) 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자야(1916~1999) 여사가 한 자 한 자 눌러쓴 자필 편지의 도입부입니다. 수신인은 백석 연구자인 이동순(75) 시인. 1987년 '백석 시전집'을 발간한 이 시인에게 자야 여사가 불쑥 연락을 넣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10년가량 왕래했다고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에서 교사 재직 중 인연을 맺은 기생 진향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줬습니다. 둘은 끝내 맺어지진 못했죠.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백석의 시는 오랫동안 금서가 됐고요. 남쪽에 홀로 남은 자야 여사는 "그 이름을 지어준 본인이 뛰어올지 달려갈지 그날이 올지"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쓰면서 적적한 마음을 달랬던가 봅니다. 자야 여사로부터 30여 통의 편지를 받고 이 시인은 여사의 글씨를 '자야체'라 명명했는데요. 그가 최근 펴낸 '그간 격조했습니다'에 서간의 일부가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책은 이 시인이 지난 50여 년간 김광균·김규동·김지하 시인, 황석영·송기원·김성동 소설가, 백낙청·염무웅·최원식 비평가 등 39명과 주고받은 친필 편지 64점을 문학적 단상과 함께 엮어낸 산문집입니다. 부제는 '편지로 읽는 한국문학의 발자취'. 육필 서신을 통해 한 시절을 살아낸 작가들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책장을 덮는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용기 내어 안부를 건네 보세요. "그간 격조했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그간 격조했습니다·이동순 지음·창비 발행·344쪽·1만7,000원 |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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