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의 야외 작업실이었던 비베뮈스 채석장. |
남프랑스를 마음에 새겨둔 건 폴 세잔의 그림을 처음 본 뒤였다. 그림에 스며 있는 빛과 색, 작가가 집요하게 붙들었던 풍경을 언젠가 직접 보고 싶어졌다. 여름이면 라벤더와 포도 넝쿨이 햇살 아래 출렁이고 사계절 내내 따뜻한 공기가 도는 땅. 그렇게 남프랑스행을 결심했다.
세잔의 마지막 작업실 아틀리에 데 로브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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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상프로방스서 시작된 세잔 여정
여행의 시작은 분수의 도시 엑상프로방스였다. 몇 걸음만 옮겨도 세잔이 왜 이곳을 떠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잔의 고향이지만 1984년까지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세잔 사후, 그라네 미술관 관장이 그의 작품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생긴 일이다. 시간이 흐르며 분위기가 달라졌고 지금 미술관은 세잔 작품 10점 이상을 품었다.
엑상프로방스를 더 뜨겁게 만든 건 지난 6월 28일 공식 개막한 '세잔의 해'였다. 그라네 미술관에서 열린 국제 특별전 '세잔 오 자 드 부팡'은 세잔이 40년을 보낸 별장 '자 드 부팡'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올해가 기념년은 아니지만 시는 세잔의 유산 복원을 마무리하는 시점으로 설명했다. 전시에는 자 드 부팡에서 탄생한 유화·수채화·드로잉 130여 점이 모였다.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작품이 집결한 순간이었다.
전시가 좋았던 건 미술관 밖에서 진짜 여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잔의 여정을 따라가려면 자 드 부팡, 아틀리에 데 로브, 비베뮈스 채석장 순서가 좋다. 엑상프로방스 외곽의 18세기 저택 자 드 부팡은 세잔 가족이 40년 머문 곳이다. 어린 시절과 20대 작품이 이곳에서 나왔고, '바람이 부는 곳'이라는 뜻처럼 넓은 정원과 밤나무 길은 세잔이 반복해 그린 풍경이다. 복원 과정에서 25세의 세잔이 그린 초기 벽화를 발견해 장소에 이야기를 더했다. 정원을 천천히 걸으며 세잔이 본 빛과 색을 함께 따라갈 수 있다.
세잔의 마지막 작업실 아틀리에 데 로브는 북쪽 언덕에 자리한다. 그는 생트 빅투아르 산을 정면에 두고 작업할 수 있게 공간을 직접 설계했다. 정물화 속 항아리·병·해골 등 소품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가 손을 멈춘 순간이 생생하다. '정원사 발리에' '대형 목욕하는 사람들' 같은 말년 대표작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조금 떨어진 비베뮈스 채석장은 세잔의 야외 작업실이었다. 로마 시대부터 돌을 캐온 장소로 붉은 암석과 소나무 숲이 이어진 풍경이 강렬하다. 세잔은 지질학자 앙투안-포르튀네 마리옹과 교류하며 바위의 형태와 색을 연구했다.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과 '기암절벽 풍경'도 이곳에서 나왔다. 작은 오두막은 그가 장비를 놓아두고 쉬던 자리다.
샤토 라 코스트에서 열렸던 하종현 작가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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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라 코스트, 예술과 와인의 조합
엑상프로방스에서 북쪽으로 15분가량 이동하면 풍경이 또 달라진다. 포도밭과 장미, 참나무, 올리브나무, 작은 시냇물이 이어지고 이 길 끝에서 샤토 라 코스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광활한 와이너리이자 현대미술·건축이 자연 속에 펼쳐진 복합 공간이다. 아일랜드 출신 사업가 패트릭 매킬런이 매입해 세계적인 작가들을 불러 모으며 지금의 풍경을 만들었다. 데이미언 허스트, 루이스 부르주아, 구마 겐고,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장 누벨, 프랭크 게리의 작품과 파빌리온이 포도밭과 숲길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안도 다다오의 아트센터, 금속판 지붕이 얹힌 장 누벨의 와인 저장고, 프랭크 게리의 음악 파빌리온까지 둘러보면 세 시간도 부족했다. 유기농법을 택한 와이너리에서 와인 테이스팅 프로그램도 빠질 수 없다. 이곳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단색화 거장 하종현 작가의 개인전이었다.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파빌리온 한가운데서 그의 신작 10여 점이 포도밭과 어우러져 있었다. 마포 뒷면에 물감을 밀어 넣는 '배압법' 특유의 질감과 색이 공간을 꽉 채웠다.
남프랑스 사람들이 휴양지로 찾는 세르퐁송 호수. |
라벤더, 호수, 그리고 프로방스서 휴식
라벤더를 따라 알프드오트프로방스 쪽으로 방향을 틀면 라 본 에타프를 만난다. 18세기 역참에서 시작해 1919년부터 레이·글리즈 가족이 운영해왔다. 오너이자 미쉐린 셰프 제니 글리즈가 이끄는 레스토랑은 1964년 첫 별을 받은 이후 60년 넘게 미쉐린 1스타를 유지하고 있다. 6000㎡ 유기농 정원에서는 꽃과 허브, 과일, 채소가 자라 산책과 쿠킹 클래스가 가능하다.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의 고향 마노스크도 여행 여정을 풍성하게 한다. 록시땅 공장 투어에서는 비누와 스킨케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직접 볼 수 있고 지중해식 정원을 걸으며 향기와 역사를 함께 체험할 수 있다.
여름의 남프랑스를 대표하는 풍경은 발랑솔 라벤더 밭이다. 라벤더 절정기인 6월 말~7월 중순이면 보랏빛 고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중간중간 올리브나무와 밀밭, 해바라기밭이 섞여 남프랑스 특유의 색을 완성한다.
남프랑스 사람들이 휴양지로 찾는 세르퐁송 호수는 올해 '예술과 역사 유산지구'로 지정됐다. 뒤랑스강 범람과 가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호수지만 지금은 청록빛 물결과 수상 레저로 사랑받는다. 물 아래 잠긴 마을의 흔적이 독특한 장면을 만들고 여름이면 요트와 카약, 하이킹으로 활기를 띤다. 그중에서도 생 미셸 채플은 필수 코스다. 원래 사빈 마을의 중심이었는데 수몰을 피한 위치 덕분에 바위섬 위에 지금도 홀로 남아 있다. 또 다른 명소는 샹틀루브 고가다리다. 완공되지 못한 철도 노선의 흔적으로, 계절에 따라 물속에 잠겼다가 드러난다.
프로방스 여행의 관문은 마르세유다. 인천~파리행 에어프랑스 직항과 파리~마르세유 연결편을 이용하면 편하게 닿을 수 있다. 남프랑스는 세잔의 빛에서 시작해 라벤더 향, 와인, 자연과 역사까지 하나의 긴 여정으로 이어졌다.
※취재 협조=프랑스 관광청·에어프랑스·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관광청
[엑상프로방스 권효정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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