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국가 상대 손해배상청구소송 2차 변론기일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4명 증인신문 참여
강제노역·가혹행위 증언…"이제라도 사과해주길"
26일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들이 부산지법에서 열린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 2차 변론기일에서 증언한 후 법정을 나오고 있다. 김혜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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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최대 규모의 집단 수용시설이었던 영화숙·재생원에서 강제 노역과 폭행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처음으로 증언대에 섰다. 피해자들은 어린 시절 지옥 같았던 그곳에서의 기억을 고백하며 눈물로 국가의 책임을 호소했다.
부산지법 민사11부(이호철 부장판사)는 26일 오전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등이 정부와 부산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두 번째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이날 증인 신문에는 손석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를 비롯해 김명식 씨, 이인철 씨, 강철원 씨 등 4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시설에서의 괴로웠던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종일 노역 시키면서 밥도,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아"
가장 먼저 증언에 나선 김명식씨는 5살 무렵 새어머니에게 버려져 6~7년간 영화숙·재생원에서 지냈다. 그는 "12살 전까지는 어려서 도망갈 생각을 못했고 이후 너무 배고프고 힘들어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다 잡혀오면 집단 구타를 당했다"며 처참했던 그곳에서의 생활을 회상했다.김씨는 "종일 산에서 돌을 주워오거나 축사를 짓는 일을 했는데 식사는 보리밥과 소금국, 강냉이죽이 전부였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흙을 파먹고 풀을 뜯어먹었다"며 "물도 주지 않아 급하면 소변을 받아먹어야 했고 물을 찾으러 갔다가 도망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15살 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남이 버리고 간 복어를 주워먹었다가 사경을 헤맨 기억도 증언했다. 그는 "어리고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도 제대로 치료해주지 않아 밤새 네 발로 기어다니며 잠들지 않으려고 버텼다"며 "함께 병원 앞에 내려졌던 다른 친구들은 그 뒤로 다시 보지 못했다. 아마 죽었을 것"이라며 말했다.
김씨는 "참말로 진짜…"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또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아이처럼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도망치면 잡아넣는 '연락사무소'부터 단계별 수용시설까지
26일 손석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가 부산지법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혜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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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숙·재생원은 연안부두 인근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시설로 데려갈 아이를 잡아들이거나 도망친 아이들을 단속했다. 파출소에서 보호 중인 아이를 넘겨받아 시설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피해자 이인철씨는 "단속원들이 신규로 붙잡혀오거나 도망쳤다가 다시 잡혀온 아이들을 한 방에 10여 명씩 가둬 놓고 감시하다가 밤이 깊으면 트럭으로 아이들을 영화숙이나 재생원으로 실어 날랐다"며 "처음 입소하면 재생원으로 먼저 옮겨져 강도 높은 단체 기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입소 과정은 재생원에 가장 먼저 입소해 단체 생활에 적응하면 영화숙, 1~3소대로 옮겨지는 등 단계별로 나눠져 있었으며, 재생원에서는 특히 심한 폭력과 단체 기합이 반복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강철원씨는 재생원을 '자유가 없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하루 세끼 밥 먹는 것보다 기합을 더 많이 받았다"며 "엎드려 뻗친 아이들이 줄을 이루면 그 위를 짓밟고 지나갔다. 그러다 쓰러지면 더 맞는 이른바 '한강철교'라 불린 기합이 기억난다"며 "기합을 받다 죽는 아이들도 봤다. 공포심을 심으려 일부러 모두 보게 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 고백도…그 시절 멈춘 기억 "이제라도 구해달라"
영화숙·재생원에서는 강제노역과 폭행에 이어 성폭력도 자행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학교 시절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여름방학 동안 신문을 팔러 부산에 왔다가 시설에 수용됐다는 손석주 대표는 당시 소대장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격렬하게 저항하다 각목에 맞아 팔을 크게 다쳤는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아픔을 고백했다.피해자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시설로 옮겨져 교육을 받고 사회에 적응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시설을 나온 뒤에도 그 시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자들은 이제라도 정부가 국가 폭력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해줄 것을 호소했다.
손석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는 "누군가 우리를 찾아주지 않으면 영원히 그곳을 나올 수 없다는 공포감이 제일 컸다. 이제는 국가가 저희를 구해주면 좋겠다"며 "얼마 남지 않은 피해자들이 눈 감기 전 억울함 풀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영화숙·재생원은 1951년 설립된 이후 1970년대까지 부산에서 운영된 수용시설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월 영화숙·재생원에서의 강제 노역과 가혹행위 등을 국가 폭력으로 공식 인정하고 정부와 부산시에 사과와 치유 대책 마련을 권고했다.
이에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와 유족 185명은 지난 6월 정부와 부산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지난 10월 진행된 첫 변론기일에서 정부와 부산시는 영화숙·재생원이 사적 기관이며 구체적인 피해 사실은 원고가 입증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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