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남성의 성적착취와 권력남용 소환…"불편하지만 의미 있는 작품"
연극 '운전 배우기' |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중년 여성의 목소리로 복기 되는 소아성애에 대한 소녀의 기억은 여전히 불편했다.
지난 22일부터 서울 대학로 여행자극장에서 상연 중인 연극 '운전 배우기'는 1998년 퓰리처 드라마 부문 상을 받은 폴라 보겔의 희곡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연극은 운전 교습이라는 일상적 행위를 축으로, 시간은 앞뒤로 뒤섞이고, 장면은 '기억의 파편'처럼 배치한다. 40대 중년이 된 주인공 '릴빗'의 내레이션이 극 전체를 이끌고, 그녀의 이모부이자 가해자인 '펙'이 회상 장면에 출몰하며 긴장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는 펙은 처제의 딸이 태어나자 너무나 작고 예쁜 모습에 '아주 작다(Li'l Bit)'라는 뜻을 가진 릴빗이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하지만 펙이 10대 초반으로 성장한 릴빗에게 운전을 가르쳐준다며 성적 접촉을 강제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연극 '운전 배우기' |
유사한 주제를 다룬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남성 화자의 관점이었다면, 이 작품은 철저히 여성의 입장에서 서사를 구축한다. 펙과의 관계 속에서 겪는 트라우마와 성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운전 배우기'라는 은유를 통해 펼쳐진다.
작품은 단순한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를 넘어서는 복합적인 감정선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불편함과 공감 사이를 오가며, 트라우마와 치유, 용서와 성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마주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집중도와 몰입도는 특히 인상적이다. 금기시되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흔들림 없이 캐릭터를 구축해낸 연기력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펙 역의 김대진 배우 연기는 '좋은 이웃'이라는 외견과 권력관계를 이용하는 가해자의 이중성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릴빗 역의 정수영 배우도 어린 시절의 모호한 감정과 뒤늦게 찾아온 분노·자책을 섬세하게 겹쳐 놓으며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연극 '운전 배우기' |
다만 무대 전반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 공존한다.
한편에서는 원작이 지닌 구조적 실험성과 불편한 정치적·성적 질문들이 무대 언어로 충분히 번역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관객이 정면으로 마주하기 어려운 성적 착취와 가정 내 권력 문제를 집요하게 응시하게 만든다는 반론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운전 배우기'가 관객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충분히 유효하다. 운전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 아래, 소녀의 몸과 시간을 점유해온 어른 남성 권력의 비루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작품이 이런 불편한 질문을 완벽하게 무대에 형상화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른 남성의 성적착취와 권력남용의 기억을 다시 소환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공연은 30일까지 여행자극장에서 이어진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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