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3.4배 면적에 한우 3천마리 사육…15년 만에 개방
늦가을 풀들은 볕의 온기를 흙과 나누고 어느새 흙빛을 닮아간다. 하늘의 짝은 애초에 땅이었음을….
드넓은 초지를 훑던 시선은 언덕 너머로 달아나고, 목장의 풀은 겨울을 준비한다.
서산 한우목장길 [사진/백승렬 기자] |
2024년 12월 19일에 개방했다고 하니 1년이 채 안 됐다. 한우목장길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어림잡기도 어려웠다.
서산 해미읍성 앞에서 점심을 먹고 차로 15분쯤 달렸다. 둥글둥글한 구릉지가 나타나더니 내비게이션이 금세 도착을 알린다.
계단 위를 오르니 광활한 초지가 펼쳐졌다. 시원스럽다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서산 한우목장 안에 신기루처럼 떠 있는 숲 [사진/백승렬 기자] |
◇ 15년 만에 열린 초원의 문
한우목장길은 2.1㎞ 길이의 데크길이다. 경사로는 램프와 계단이 같이 있거나 램프로 이뤄진 무장애길이다.
광활한 국가 소유의 서산한우목장을 가로지르니 풀 위에 난 길은 대지의 끝, 멀리 지평선을 향해 있다.
목장은 2010년 구제역 파동 이후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다가 15년 만에 금단의 문을 열었다.
끝없이 이어진 목장의 풀은 지금 황금색이다. 한우의 몸 색깔을 닮아가는 걸까.
소가 먹는 생초를 밀봉한 사일리지 [사진/백승렬 기자] |
언덕 밑에 메타세쿼이아 숲이 신기루처럼 떠 있고, 그 옆엔 작은 연못도 반짝인다.
소들이 먹는 생초를 밀봉, 저장해놓은 분홍색 곤포 사일리지는 야외에 전시된 조각 작품 같다.
완만한 오르막을 20분쯤 걸으니 전망대가 나온다. 동쪽에 서해안고속도로, 그 위로 석문봉도 맨눈으로 보인다.
서산 한우목장길 전망대 [사진/백승렬 기자] |
전망대는 목장길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지만, 망원경이 설치돼 있는 걸 봐서는 뭔가 다른 것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뭐가 보이는 걸까. 동남쪽으로 포커스를 맞췄다. 한우다. 1∼2㎞는 족히 떨어진 듯한 구릉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 떼가 보였다.
이 목장은 도대체 얼마나 큰 걸까. 나중에 알았다. 목장은 여의도 면적의 3.4배. 20억원짜리 씨수소 100마리를 포함해 3천마리의 소가 이곳에 산다는 사실을.
서산 한우목장의 소떼 [사진/백승렬 기자] |
◇ '가티'와 '오슈'
처음에 씨수소 한 마리가 20억원이라는 건 믿기 어려웠다. 웬만한 서울 아파트 한 채보다 비싼 몸값이다.
씨수소는 말 그대로 씨를 받기 위해 기르는 소다. 씨수소의 정액을 받아 냉동시킨 뒤 이를 전국의 한우 농가에 공급한다.
전국의 한우 97%가 이곳에서 씨를 받아 태어난다고 한다.
씨수소가 왜 비싼지, 그리고 왜 이곳이 오랫동안 출입 통제됐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서산 한우목장길 전망대에는 설치돼 있는 서산시의 관광 마스코트 '가티'(GATI)와 '오슈'(OSYU). [사진/백승렬 기자] |
전망대에는 서산시의 관광 마스코트 '가티'(GATI)와 '오슈'(OSYU) 설치물도 있다.
가로림만의 점박이물범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마스코트가 물범을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티와 오슈가 '같이 오세요'라는 말의 충청도 사투리였음을 알았을 땐 대전시의 공유 자전거 '타슈'를 탔을 때만큼이나 웃었다.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곳곳에 흔들의자가 쉬었다 가라고 유혹한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가니 길은 왼쪽으로 꺾어진다. 완만한 내리막이다.
길 오른쪽에 잎이 거의 떨어져 가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전부 벚나무였다.
서산 한우목장길 벚나무길 [사진/백승렬 기자] |
◇ 단단해지는 꽃눈
미래는 모두 가능성일 뿐이지만,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한다. 아니 상상이 행복의 본질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봄을 생각하니 가슴이 차오른다.
초원의 한가운데 자리한 벚꽃길은 목장의 정원이자 축복이다. 내려갈수록 잎은 성기고 가지는 앙상하다. 그래도 벚나무의 꽃눈은 단단해지고 있을 것이다.
겨울나기를 앞둔 벚나무가 대견하다면 이곳을 지날 때 최소한 곁눈은 줘야 하지 않을까.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최후를 맞았지만, 이곳에서는 가급적 자주 뒤를 돌아보는 게 좋다.
걸어온 만큼, 지나온 만큼, 풍경은 달라져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절반의 감상 기회를 놓치게 된다. 끝까지 갔다가 온길을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서산 한우목장길 데크길 흔들의자 [사진/백승렬 기자] |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돌아보니 갈수록 걸음은 느려지고 어느새 해는 기울고 있다.
앞서간 연인의 웃음소리가 투명해진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바람도 차가워진다.
차도에 근접한 마지막 직선 코스를 걸어가는데 길 건너 언덕 밑에 자그마한 하얀색 건물이 나타났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카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가을과 봄만 생각하다가 겨울을 잊고 있었다. 초원 위를 걸으며 눈 내린 목장을 상상하지 못한 빈약한 상상력을 자책했다.
서산 한우목장길 도로 건너에 있는 카페 [사진/백승렬 기자] |
◇ '백제의 미소' 앞에서
한우목장길에 왔다가 '백제의 미소'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최근 국보로 지정된 보원사지 오층석탑, 조선시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해미읍성, 겹벚꽃이 피는 개심사를 놓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이 네 곳은 목장길에서 모두 차로 10∼15분 거리에 있다.
마애여래삼존상을 보는 순간 바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무거워진 저녁 햇살이 미소의 끝자락을 비출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국보) [사진/백승렬 기자] |
지친 다리를 끌고 보원사지에 들어서니 어느덧 하늘색은 차가워지고 사위는 희미해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개심사로 향했다. 개심사는 수덕사, 무량사, 마곡사와 함께 충남 4대 사찰로 불린다.
백제 의자왕 때(654년) 창건해 고려 충정왕 대(1350년) 때 중수했다.
대웅전 기단석이 백제 때 것으로, 대웅전을 비롯해 심검당, 명부전, 각종 불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보물이나 문화재가 많다.
봄이면 국내에서 유일하게 청벚꽃이 피고 겹벚꽃과 왕벚꽃이 만개하는 개심사는 봄에 가야만 하는 줄 알았다.
가보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법. 가을 국화와 단풍이 절 전체를 수놓고 있을 줄이야.
아쉬운 11월의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작은 절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 불심이 따로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국화로 장식된 서산 개심사 [사진/백승렬 기자] |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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