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통상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해법은 멀리서 찾기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일본과의 경제 협력이 다시 거론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출발선에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이 있다.
한국은 이미 미국, 유럽연합, 중국과 FTA를 체결했다. 주요 교역국 가운데 일본만 유일하게 공백으로 남아 있다. 세계 4위 경제권과의 FTA 부재는 더 이상 외교적 미완이 아니라 기업과 산업이 매일 비용으로 감당하는 구조적 손실이 됐다. 관세는 관세대로 내고, 물류와 통관 비용은 중복으로 들고, 경쟁국은 무관세로 거래하는 상황이 굳어지고 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손실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마이크론 공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은 일본 히로시마에 대규모 공장을 짓고 있으며 곧 가동을 앞두고 있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전략 사업이다.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일본 기업들이 굳이 한국에서 메모리를 들여올 이유가 없다. 물류비와 관세, 환율 변동까지 감수하면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제품을 써야 할 유인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일 관계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상 간 셔틀외교가 이어지고, 외교의 중심도 안보에서 다시 경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을 순방하고, 그 자리에서 한일 FTA 협상 개시가 공식 의제로 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장은 방향 전환의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통상에서 시장은 선언보다 방향에 먼저 반응한다.
이재명 대통령과 손정의 회장의 만남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손 회장은 기술과 자본, 시장의 교차점을 집요하게 읽어 온 인물이다. 그가 한일 경제협력을 주제로 논의한 장면은 단순한 면담 이상의 메시지를 갖는다. 국가 간 협력이 다시 자본과 산업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신호가 시장에 던져진 셈이다.
물론 한일 FTA는 쉽고 단순한 과제가 아니다. 농업과 서비스, 규제와 표준을 둘러싼 이해 충돌은 불가피하고, 과거사 문제도 현실적으로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치는 멈춰도 경제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협상이 늦어질수록 기업은 대체 시장으로 이동하고, 공급망은 다른 축으로 재편된다. 미룬 시간만큼 기회는 줄어든다.
한국은 이미 중국과 FTA를 체결했다. 중국과는 가능하고 일본과는 불가능하다는 논리는 통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통상은 감정이 아니라 계산의 영역이고, 국익은 구호가 아니라 수지로 남는다. 한일 FTA를 둘러싼 논쟁도 이제는 당위보다 숫자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메가 자유무역협정인 CP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한일 FTA는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의 문제다. 내년 초에는 최소한 협상 개시 선언, 로드맵 제시, 실무 채널 가동 정도의 가시적 성과가 나와야 한다.
기업은 이미 준비하고 있고, 시장은 방향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남은 변수는 정부의 결단뿐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시험대에 섰다.
아주경제=칼럼니스트 이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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