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죽어야 합니다
파트리시아 에방헬리스타 지음 | 김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536쪽 | 2만5000원
필리핀 마닐라 빈민가에 사는 열한 살 소녀 레이디 러브는 걱정이 많았다. 엄마에겐 술을 끊으라고, 아빠에겐 담배를 끊으라고 잔소리하는 게 러브의 일상이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새벽 복면을 쓴 남성들이 총을 들고 집에 들이닥쳤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던 아빠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엄마는 무릎을 꿇은 채 죽었다. 복면 쓴 남성은 외쳤다. “우리가 두테르테다.”
두테르테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수행한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피살됐다. 필리핀 정부 통계는 8000명, 국제 인권 단체의 추산은 그 네 배인 3만명. 필리핀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6년 동안 이 죽음들을 추적하고 기록했다. 저자가 일한 언론사 ‘래플러’의 대표 마리아 레사는 202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이 책을 2023년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았다.
두테르테는 여러 선거에서 자신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집에서 가난하게 자란 아웃사이더라고. 그가 지낸 도시 다바오는 ‘먹물’이 아닌 ‘거리의 언어’로 말하는 곳이었다고 했다. 두테르테는 법조인이 되고 시장, 하원의원을 지낸 뒤 대통령까지 된다. 그는 입버릇처럼 “저는 평범한 서민입니다. 그래서 서민을 압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론 정치 엘리트 집안에서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경호원에 둘러싸여 자랐지만 말이다. 두테르테에게 어린 시절 정도는 아무렇게나 바꿔도 되는 것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자국민 학살을 ‘마약과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순간 살인은 ‘단죄’가 된다.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게 대중이 동조한 이유 중 하나다. 경찰과 민간인 모두 마약과 관련있을 것 같은 사람을 죽였다. 저자는 이를 ‘정치에 의한 언어의 부패’라고 불렀다. 국제 인권 단체는 피살된 이를 3만명으로 추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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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행이 거친 리더였다. 추진력이 강하다 못해 도를 지나쳤다. 마약과의 전쟁을 치르겠다며 대선에 나설 땐 “히틀러는 유대인 30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지금 필리핀에는 마약 중독자 300만명이 있습니다. 나는 기꺼이 그들을 도살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선 연설에서는 대중을 종용했다. “누군가의 아이가 중독자라면, 여러분 손으로 그 아이를 죽이세요. 그래야 그 부모들이 고통스럽지 않을테니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가슴팍에 ‘나는 중국인 마약상입니다’라는 종이가 붙은 시신이 연설장 인근에서 발견된다.
국가에 마약이 많으니 투약자를 없애면 안전한 국가가 될 것이란 대통령의 말은 정의로워 보였다. 리더의 서민적 이미지에 강한 추진력까지 결합되자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그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학살이라는 것도, 법치를 무시하고 재판 없이 국민의 생명을 앗아도 상관 없었다. ‘다바오 암살단’ 같은 추종자들의 단체가 활개를 쳤다.
마약은 근절되지 않았고, 마약 처벌을 빙자한 폭력과 살인만 난무했다. 법치의 고삐가 풀린 경찰은 폭력 기관 그 자체였다. 한국인도 피해자가 됐다. 2016년 한국인 사업가 지익주씨가 필리핀 경찰에 납치되어 죽는다. 경찰은 마약 단속을 가장해 가짜 영장을 내밀고 지씨를 국가경찰청 본청에 데려가 테이프로 목 졸라 살해했다. 지씨의 아내에겐 몸값 800만 페소를 요구했다. 우리나라에서 큰 분노를 샀던 ‘필리핀 한인 사업가 납치 살해 사건’이다. 외교 분쟁으로 번질 우려가 커지자 두테르테는 우리나라에 사과한다.
언어는 변질됐다. 한 상원의원은 경찰과 추종자들의 행태를 ‘약식 처형’이라고 불렀다. 국가 폭력은 ‘전쟁’이었고, 살인은 ‘단죄’가 됐다. 저자는 이를 정치에 의한 ‘언어의 부패’라고 지적했다. 부패한 언어는 실재하는 사실(fact)과 대응하지 않았다. 새로운 단어들도 생겨났다. ‘구조하다’는 뜻의 희망적인 영어 ‘Salvage’엔 ‘범죄 용의자를 재판 없이 체포하거나 처형하다’는 뜻이 추가됐다. 2015년에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올랐다. 이 책의 원제 ‘Some People Need Killing’은 저자가 만난 자경단원의 말이다. 살해당한 게 아니라 죽음이 필요하다는 뜻. 대중은 이 말처럼 폭력을 욕망했다.
두테르테는 지난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수감됐다. 필리핀 대중은 지금도 그를 찾는다. 그는 5월 열린 지방선거에서 정치적 고향인 다바오시 시장에 옥중 당선되기까지 했다. 이것이 꼭 필리핀만의 이야기일까. 이 책은 국가 폭력이 가능했던 것은 대중이 동조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이민과의 전쟁’으로 동맹국 근로자를 구금시켰다. ‘내란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반대 진영을 ‘나치’라 부르고 사법부를 ‘단죄 대상’ 삼는 나라도 있다. 필리핀에서 자행된 국가 폭력과 함께 언어의 의미가 변질된다는 점을 간파한 것도 이 책의 큰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박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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