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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하현옥의 시선] ‘생산적 금융’이라는 플리 바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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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하현옥 논설위원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닌 오락가락. 게다가 고무줄 규제까지.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과징금을 둘러싼 금융감독원의 행보가 그야말로 갈지자다.

    지난달 28일 금감원은 홍콩 H지수 ELS 불완전판매를 근거로 은행 5곳에 2조원의 과징금을 사전 통보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최종 부과액은 금감원의 제재심을 통해 결정되고 금융위원회 의결을 거쳐 확정되지만, 시장이 놀랄 만큼 센 불방망이를 들었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소비자 보호 관점에서 금융 당국의 입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소비자 보호는 중요하지만 은행 입장에서 홍콩 H지수 ELS와 관련한 역대 최대 규모의 과징금 통보는 당혹스러운 측면이 있다. 금융감독 당국의 말을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강해서다. ELS 사태가 본격화하고 피해 보상 논의가 진행되던 지난해 이복현 전 금감원장은 “은행이 소비자 피해 보상 조치를 선제적으로 이행할 경우 향후 검사 및 제재 절차에서 정상 참작하겠다”고 했다.

    2023년 홍콩 H지수 급락 여파로 2020년부터 판매한 16조3000억원 규모의 홍콩 H지수 ELS에서 4조6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하자 금융감독 당국은 선제적 배상을 종용했고 이에 대한 논란은 이어졌다. 금융사의 불완전판매로 투자자 손실이 발생했다면 당국의 검사와 제재, 법적 절차를 통해 풀어야 할 문제임에도 소비자 보호만 앞세운 당국의 팔 비틀기가 적절하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ELS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중금리 상품으로 여겨지면서 홍콩 H지수 ELS 투자로 손실을 본 가입자 10명 중 9명(91.4%)이 과거 ELS 투자 경험이 있었던 만큼 은행에 속았다며 배상을 요구하는 건 과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때문에 당국의 배상 압박이 투자의 자기 책임 원칙을 훼손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우려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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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3월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피해자들이 시위하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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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S 과징금 2조원 통보한 금감원

    대출 여력 줄며 정책 걸림돌 되자



    과징금 조정·자본 규제 완화 시사

    그럼에도 ‘정상 참작’을 기대한 은행들은 금융감독 당국이 제시한 분쟁 조정 기준을 바탕으로 사실 조사를 마무리하기 전 선제적 배상에 나섰다. 지난 6월 기준 투자자 96%와 합의에 성공했다. 은행 5곳이 지급한 배상액은 1조3437억원이다. 하지만 정상 참작은 온데간데없고 어마어마한 과징금 청구서만 날아들었으니, 당국을 믿은 죄를 탓할 뿐이었다.

    그런데 사흘 뒤인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찬진 금감원장은 “은행의 사후 구제 노력을 충분히 참작해 금융위와 협의를 통해 과징금 한도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징금과 관련한 자본 규제 완화도 시사했다. 과징금 폭탄을 던지겠다던 금감원의 급격한 태세 전환에는 이재명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생산적 금융’이 있다. 정부 방침에 발맞춰 5대 금융지주가 5년간 508조원의 자금을 생산적 영역에 투입하겠다고 밝혔지만 과징금에 발목이 잡힐 판이 되자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과징금은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고 모험자본에 투자하는 생산적 금융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과징금이 부과되면 은행의 위험가중자산(RWA)이 높아진다. 위험가중자산은 금융사가 보유한 각 자산에 위험가중치를 곱해 산출한 금액의 총합으로, 위험가중자산이 클수록 은행은 더 많은 자기자본을 유지해야 한다. 대출 여력이 줄고 배당 등 주주환원도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다.

    특히 과징금의 위험가중치는 600~700%다. 은행이 과징금을 내면 해당 금액의 6~7배를 운영 리스크로 인식해 최대 10년간 위험가중자산으로 반영해야 한다. 과징금 규모가 2조원으로 확정되면 위험가중자산은 12조~14조원 늘어나게 된다. 금융 당국이 주택담보대출의 위험가중치 하한(15→20%)까지 높여가며 가계대출을 죄고 기업대출 여력을 확대해 생산적 금융에 드라이브를 거는 상황에서 홍콩 H지수 ELS 과징금이 복병으로 떠오르자 부랴부랴 과징금을 줄이고, 규제 완화에 나서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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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일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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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H지수 ELS 과징금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금융감독 당국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필요할 때는 정상 참작 같은 당근을 내걸고 유인하다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꿔 채찍을 휘둘러대는 모습에 믿음은 사라졌다. 더 우려스러운 건 일관된 기준 없이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는 규제다. 플리 바겐(유죄 인정 후 형량 감경 협상)도 아닌데 금융사의 부실 관리를 위한 자본 규제를 생산적 금융이란 정책의 도구로 활용하는 금융감독 당국의 행보는 위험천만이다. 금융 상품의 불완전판매를 응징해야 할 금융감독 당국이 규제를 불완전판매 하는 꼴 아닌가.

    하현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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