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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 (화)

    [글로벌 아이] 이민자들에게는 슬픈 날,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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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1940년대 미국 뉴욕의 한 고급 아파트. 수동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는 남자가 승객들에게 툴툴댄다. 이런 박봉으로는 성탄절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난한 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슬픈 날이라고. 남자의 과장된 넋두리에 동정심이 발동한 입주민들이 음식이며 옷, 술과 지갑까지 건네기 시작했고, 그의 사물함과 방은 금세 선물로 가득 찼다. 남자는 이제 행복해졌을까.

    존 치버의 단편소설 ‘가난한 자들에게는 슬픈 날, 크리스마스’의 내용이다. 성탄절이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설파되는 사랑과 나눔, 그 실체는 무엇인가. 이 짤막한 소설은 그것이 ‘위선’일 수 있음을 담담히 고발한다. 선물이 넘치자 남자는 들뜨고, 동정하던 입주민들의 마음에도 미묘한 균열이 생긴다. 자신만이 ‘유일한 자선가’이길 바랐기에, 그가 여러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불쾌했던 것이리라. 끝내 그는 들뜬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난폭하게 몰다 ‘문제 직원’으로 낙인찍혀 해고된다.

    중앙일보

    현지시간 4일 미국 백악관 앞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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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 백악관 앞에서 열린 ‘국가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을 취재하며 이 소설을 떠올렸다. 캐럴이 연주되는 가운데 연단에 오른 트럼프 대통령은 치버의 소설 속 입주민들처럼 이웃을 연민하는 일의 가치를 강조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거대한 트리 앞에서 그는 자신의 더 거대한 업적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의 성탄 메시지는 그래서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들렸다. 그는 “우리는 미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다른 대목에선 “국경순찰대가 선을 보호하고 악을 막아냈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트럼프에게 이민자는 ‘이웃’이 아니라 ‘악’이었던 셈이고, 오로지 미국 시민만이 ‘우리’에 속하는 ‘선’이었던 것이다.

    최근 백악관 인근 총격 사건의 범인이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밝혀지며 이민자 단속이 더 강화됐다. ‘아메리카 퍼스트’가 성탄절마저 지배하는 트럼프의 미국에선 합법 이민자도 차별의 시선을 견딜 때가 많다. 트럼프는 점등식에서 요한복음 1장 4절을 인용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부디 그 생명의 빛마저 미국인의 것이라고 우기지 말기 바란다. 예수 정신은 국적이나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배타주의가 아니라, 어떤 출신의 타자라도 포용하려는 ‘이웃 사랑’에 있다고 믿는다. 가난한 자에게도 이민자에게도, 크리스마스가 슬픈 날이 되지 않기를. “미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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