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에서 깨다/정병호 지음/280쪽·2만3000원·푸른숲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던 저자는 1989년 가을 일본 홋카이도에서 ‘이상한 스님’, 도노히라 요시히코를 만난다. 도노히라 스님은 일본 사회에서 차별당했던 아이누 사람들의 장례를 정성껏 치러줬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이 스님은 마을 숲에 묻힌 유골을 찾아내 불교식으로 화장해 주고 있었다. 이 유골은 1935∼1943년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댐 공사에 강제 동원됐다가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것이었다.
당시 공동 육아를 연구하던 저자는 슈마리나이 현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도노히라 스님에게 화장을 멈춰 달라고 했다.
“좋은 뜻으로 잘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범죄 현장이자 범죄 희생자가 묻혀 있는 자리입니다. …전문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은 (제가) 논문 쓰는 게 급합니다. 빨리 논문을 쓰고 한국에서 교수가 되면 학생들과 다시 오겠습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된 저자는 9년 뒤인 1997년 여름 슈마리나이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자신의 제자들은 물론 일본인, 재일 교포, 대만 청년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이 만들어졌고, 발굴은 학계 사람들은 물론 예술가와 지역 사회까지 참여하는 평화와 화합의 장이 됐다. 이 과정을 저자의 글과 구술 녹취록을 바탕으로 풀어낸 책이다. 저자인 정병호 교수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슈마리나이 풀숲에 묻혀 있던 유골 115구는 결국 광복 70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일본 땅에서 일본 스님이 분골했고, 일본 절이 마련한 117개의 유골함에 담긴 채. 그리고 삿포로에서 그냥 비행기에 실려 오는 것이 아니라 도쿄,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시모노세키까지 일본 열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기억의 길’을 만들면서 천천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저자는 “단지 유골의 이동이 아니라 존엄의 회복을 위한 행진이라고 믿었다”고 회고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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