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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1 (일)

    [이봉호의 세계 명반 산책] 비틀스가 남긴 1969년의 음악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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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비틀스 'Abbey Road' 앨범 이미지.


    전설의 시작점은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밴드의 명칭은 최종적으로 비틀스로 정해졌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라는 양대 산맥이 버틴 비틀스는 두 명이 경쟁적으로 히트곡을 양산해냈다. 이들은 작사와 작곡을 함께 완성하는 방식으로 비틀스의 여러 앨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룹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조지 해리슨의 음악적 능력도 대단했지만 레넌과 매카트니의 아우라에 가려진 상황을 버텨내야만 했다.

    영국을 넘어 유럽을 뒤흔든 비틀스의 인기는 미국으로 향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대중문화가 미국에서 다시 인기를 타는 상황을 의미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 본토에 밀어닥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개척자는 바로 비틀스였다. 이전까지 영국의 로큰롤 사운드는 미국에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비틀스의 성공을 필두로 롤링스톤스, 애니멀스, 레드제플린 등의 밴드가 미국이라는 거대 음악시장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렸다.

    엄청난 인기 속에서 순회공연을 이어 가야 했던 비틀스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4명의 슈퍼스타는 숙소와 공연장을 제외하면 외출 자체가 어려워질 정도로 통제된 상황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4인방의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틀스는 순회공연 중단을 선언하고 신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완성했지만 멤버 간의 이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후 1969년 등장한 앨범이 'Abbey Road'였다.

    'Abbey Road' 재킷에는 4명의 멤버가 런던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 건너편 횡단보도를 걷는 사진이 시선을 붙잡는다. 비록 서로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녹음했지만 수록곡을 들어보면 마치 아무 사건도 벌어지지 않은 듯한 평온한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배경에는 비틀스의 다섯 번째 멤버로 불렸던 조지 마틴이라는 걸출한 프로듀서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레넌과 매카트니는 그룹 초기에 함께 곡을 완성했지만, 나중에는 한 명이 만든 곡에 다른 한 명의 의견을 넣어 마무리하는 방식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레넌의 색채가 강한 곡임에도 매카트니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거나, 반대의 경우를 앨범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비틀스 해체 이후 레넌의 자작곡에서 슬픔과 반목이라는 코드가 읽힌다면, 매카트니의 그것에서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만약 이들이 비슷한 음악 성향을 지녔다면 비틀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팝 아이콘의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Abbey Road' 앨범 이미지를 보면 매카트니가 맨발인 상태로 걷고 있다. 당시 비틀마니아라 불렸던 일부 팬은 해당 레코드를 구입하고 매카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이 횡단보도는 'Abbey Road'의 추억을 공유하려는 여행객들의 사진 촬영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필자 역시 2013년 브라질에서 왔다는 여행객과 애비 로드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촬영에 협조하기 위해 자동차가 늘 서행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앨범의 백미는 'You Never Give Me Your Money'를 필두로 약 16분간 이어지는 메들리 형식의 노래 모음이다. 레코드 B면에 수록된 해당 메들리 중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같은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 타이틀인 'Golden Slumbers'가 실려 있다. 'Abbey Road'는 매카트니가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참여했던 후반기 걸작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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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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