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온누리교회 이성용 목사 |
국회 앞 광장에 성탄 트리가 불을 밝혔다. 국회조찬기도회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성탄 트리 점등식은 여야 국회의원과 기독 신앙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나라와 민족, 평화와 화합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였다.
정치적 갈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함께 기도한다'는 장면 자체만으로도 이 행사는 분명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성탄은 언제나 우리에게 더 깊고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필 말구유에 오셨는가?" 그리고 오늘, 밝게 조명된 국회 앞에서 우리는 그 질문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있는가?
성탄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시작됐다. 성탄의 핵심은 화려함이 아니다.
예수는 왕궁이 아닌 외양간, 권력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 환영의 박수 속이 아니라 냄새나는 말구유에 누워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말구유가 상징하는 바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힘이 없는 자의 자리, 밀려난 자의 공간, 보호받지 못한 이들의 현실 말이다.
그래서 성탄은 단지 '축하'가 아니라 '전복'이다.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높음과 강함과 유리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기준을 깨뜨리고, 낮음과 섬김과 연약함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성탄이다.
국회에서 드려진 성탄 예배, 그 의미는 무엇인가? 국회조찬기도회가 60주년을 맞아 성탄 예배를 드리고, 여야 정치인들이 함께 기도하며 트리에 불을 밝힌 장면은 분명 상징적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강조한 것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넘어 하나로 모여 기도하는 행위는 정치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원형, 본래의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성탄의 메시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탄은 묻는다. 권력은 약자의 편에 서고 있는가? 주님이 물으시는 시간이다. 국회는 말구유의 자리에 있는 이들의 신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정치의 빛은 스스로를 비추는 조명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향해야 한다. 성탄 트리의 불빛이 더 밝아질수록, 그 빛이 향하는 방향이 더 중요해진다.
오늘 우리의 사회에는 '말구유의 자리'가 너무도 많다. 청년은 일자리와 주거 앞에서 좌절하고, 소상공인은 고금리와 경기 침체에 지쳐 쓰러지며, 돌봄의 현장은 인력 부족과 과로로 신음한다.
병상과 요양의 자리에서는 가족이 먼저 무너지고, 학교와 직장 곳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폭력과 차별이 마음을 짓누른다.
노동의 현장에서는 안전보다 속도가 우선되고, 약자의 권리는 종종 '예산'과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뒤로 밀린다.
국회가 진정 성탄을 맞이한다면, 트리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를 진심으로 예배했다면, 그분이 누우셨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의 사람들을 위한 정책과 결단으로 응답해야 한다. 성탄은 감동으로 끝나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삶과 사회를 바꾸라는 하나님의 초대이기 때문이다.
국회조찬기도회 60주년은 결코 가벼운 역사가 아니다. 기도는 언제나 시대의 양심을 일깨우는 통로가 되어왔다. 그러나 기도가 진짜 기도가 되려면, 그 기도는 자기합리화의 장식이 아니라 회개의 자리여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옳다"를 선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했다"를 고백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성탄의 주님 앞에서 정치권이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상대를 향한 비난의 칼날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로움에 대한 확신일지 모른다.
성탄은 화합을 말하지만, 그 화합은 타협이나 무색무취의 중립이 아니다. 성탄의 화합은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화합이다.
성탄의 평화는 억울한 자의 눈물을 방치한 채 얻는 '조용함'이 아니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때 찾아오는 참된 평화다.
예수께서 "평화를 주노라" 하실 때 그 평화는 강한 자의 안온함을 보장하는 질서가 아니라, 상처 입은 자의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질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국회 앞 트리의 불빛은 어디를 비추고 있는가. 가난한 이들의 주거를, 외로운 이들의 돌봄을, 불안한 이들의 생계를, 무너진 신뢰를, 찢긴 공동체를 비추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기 진영을, 자기 명분을, 자기 승리를 비추고 있는가.
성탄의 빛은 높고 환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성탄의 빛은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먼저 비쳤다. 그러니 오늘 국회의 불빛이 성탄의 빛이 되려면, 그 빛은 더 낮은 곳을 향해야 한다.
말구유의 자리로 향해야 한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신음을 덜어내는 일에, 기도와 함께 결단을 더해야 한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를 향해 "바꾸라"고 말하기 전에, 교회는 먼저 말구유로 내려가야 한다. 교회가 성탄을 기념하는 방식이 화려한 장식과 행사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탄을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가 권력의 곁에서 안전을 누리려 한다면, 말구유의 주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성탄의 주님은 언제나 밖에 계신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신다. 소외된 자리, 밀려난 사람들의 자리, 우리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그 자리에서.
국회조찬기도회 60주년을 맞는 이때, 우리는 다시 기도의 본뜻을 붙들어야 한다. 기도는 행사의 마침표가 아니라, 책임의 시작이다.
기도는 말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탄 트리의 불빛이 "우리도 빛났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비추어야 할 곳이 있다"는 부르심이 되기를 바란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는 오늘도 묻고 계신다. "너희가 나를 맞이했다면, 내가 있는 그 자리로 오겠느냐?" 국회의 불빛이 그 질문 앞에서 멈추지 않고, 그 질문을 따라 움직이기를 바란다.
그때 비로소, 국회 앞 트리의 불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성탄의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 닿아,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트리의 불빛이 진짜 성탄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자기합리 화의 장식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등불이어야 한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는 오늘도 묻고 계신다. 성탄의 예수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가 높아지기 위해 오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낮아지도록 부르러 왔다."
국회조찬기도회 60주년은 자축의 시간이기보다, 초심을 되묻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기도회는 행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양심의 자리로 존재해야 한다.
성탄의 예수는 오늘도 화려한 연단이 아니라, 말구유 같은 자리에 서 조용히 이 땅을 바라보고 계신다.
이제 성탄트리의 불은 켜졌다. 그러나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 빛이 과연 지금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성탄은 밝히는 날이 아니라, 비추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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