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암 이관술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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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좌우익의 정치적 분수령이었던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재소환되고 있다. 당시 주범으로 몰려 처형된 독립운동가 이관술 선생이 22일 재심에서 7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선생은 1930년대 경성트로이카(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경성콤그룹의 핵심으로 활동한 대중적 지도자이자 혁명가였다. 해방 직후 잡지 ‘선구’의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정치지도자’ 5위에 선정될 정도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는 이날 무죄를 선고하면서 “유죄 증거는 적법절차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일반적 법질서가 (당시) 형성된 상태”라고 했다. 지금 사법적 잣대가 아닌 당시 기준에서도 장기간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얼룩진 이 사건에 의문이 많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조공) 간부들이 1945년 10월부터 서울 소공동 근택빌딩의 조선정판사에서 1200만원의 위폐를 발행했다는 사건이다. 이 선생은 이듬해 7월 주모자로 체포됐다. 수사·재판 내내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11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처형됐다.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는 재심 판결 후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역사적 과오를 사법부가 다시 끼운 역사적 판결’이라고 했다.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이 해방정국에 미친 파장을 감안하면 틀린 평가는 아니다. 당시 최대 정당으로 미군정에 협력해 합법정당 지위를 유지하려던 조공은 이 사건 후 미군정과 정면충돌하게 된다. 그 후 9월 총파업, 10월 대구폭동으로 이어지며 역사는 긴 유혈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친일 경찰이 반공주의 바람을 타고 활동을 본격화한 시작이기도 하다. 이 선생을 체포한 건 일제 때 악질 경찰로 그를 고문한 노덕술이었다.
위폐 사건 자체는 사실일 수 있다. 당시 혼란 속에 무수한 위폐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폐 사건과 조공의 연루 여부는 이제 재검증돼야 할 문제가 되었다. 임성욱의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등에서 당시 검사의 논고나 판결의 모순점도 지적된 바 있다. 역사의 우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어긋나게 한 어둠을 묻어둘 수는 없다.
김광호 논설위원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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