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통화 세탁해 북한으로 유입시키는 역할
북한 위해 통신 장비·무기 등 대리 구입도
WSJ “중국 은신 추정···체포 불가능 가까워”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게시한 심현섭 현상수배 포스터 일부. FBI 홈페이지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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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정권이 미국의 제재를 피해 자금을 조달하는 통로 격인 이른바 ‘어둠의 은행가’의 정체와 수법을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5일(현지시간) 심층 보도했다. 이들은 가상통화 탈취·세탁은 물론 직접 북한이 필요로 하는 물품 구매에 나서기도 했다.
WSJ는 미 연방수사국(FBI)가 최근 심현섭(42)에 대한 현상금을 기존 500만 달러에서 700만 달러(약 104억원)로 올렸다고 이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심현섭은 북한 대외무역은행 계열사 대표로 해외 파견된 인물이다. 2016년 아랍에미리트(UAE)에 입국해 가족과 함께 거주하면서 UAE, 쿠웨이트 등지에서 주로 활동했다. 미 검찰은 심현섭이 이 기간에 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일가를 위한 불법자금 세탁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 자금 세탁은 중요한 외화벌이 통로다. 미국의 강력한 제재로 세탁 없이는 자금 흐름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신분을 위장한 북한 IT 노동자, 해커들이 매년 러시아, 중국,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억 달러 규모의 외화를 벌고 있지만 이를 세탁해 줄 인물이 없다면 자금은 북한으로 유입될 수 없다.
심씨는 가상통화와 브로커, 위장회사를 활용해 자금 세탁 임무를 수행했다. 먼저 북한의 ‘IT 노동자들’이 해킹 등을 통해 가상통화를 탈취한 뒤 심현섭에게 보낸다. 송금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개의 디지털 지갑을 거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자금을 받은 심현섭은 미리 매수해 둔 UAE, 중국 등지의 브로커에게 가상통화를 넘기는 대신 달러를 받는다. 브로커들이 송금한 달러는 심현섭이 설립한 위장회사 계좌로 입금된다.
심씨가 이동시킨 자금 상당수는 미국 금융 시스템을 거쳤다. 기소장, 법원 문서 등에 따르면 심현섭의 한 차례 공작 과정에서 시티·JP모건·웰스파고 등 미 은행 기관을 통해 처리된 금융거래는 310건, 7400만달러(약 1096억원)에 달했다.
탈북 후 한국에 망명한 류현우 전 주쿠웨이트북한대사관 대사대리는 해당 지역에서 심현섭을 여러 차례 만나 자금세탁 수법을 들었다면서 “(그는) (북한의) 아랍 지역 자금 세탁 관련 업무에서 가장 유용한 인물이었다”고 WSJ에 말했다.
심현섭은 이같이 세탁한 자금을 활용해 김정은 정권을 위한 물품 구입에도 직접 나섰다. 미 측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2017년 비공개 통신 장비를 구매해 북한에 보냈고, 2019년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헬기를 구입해 북한 항구로 인도했다. 헬기 구매 대금 약 30만달러는 짐바브웨의 한 법률사무소를 거쳐 지불됐다.
WSJ는 “심현섭은 ‘깨끗한 현금’을 통해 북한으로 자금이 (직접) 유입·유출되지 않으면서도 김정은 정권의 구매를 관리할 수 있었다”고 짚었다.
탈취·세탁한 자금은 ‘가짜 담배’ 제조·밀매 등 북한의 또 다른 불법 외화벌이 사업에 재투자되기도 했다. 북한은 말보로 등 유명 브랜드 담배를 가짜로 만들어 베트남과 필리핀 등에서 파는데, 여기에 필요한 담뱃잎을 심현섭 돈으로 조달한 것이다.
심현섭은 이 과정에서도 중국, UAE 등에 차려둔 위장회사를 이용했다. 이를 위한 대금 역시 시티·JP모건·웰스파고·도이체방크·HSBC·뉴욕멜론 은행을 통해 달러로 결제됐다.
가상자산 절도를 추적하는 ‘체이널리시스’(Chainalysis) 자료에 따르면 심현섭 같은 북한 은행가들이 수년간 탈취·세탁한 가상통화 규모는 60억달러(약 8조9000억원) 이상이다.
심현섭은 2023년 미국 재무부에 의해 제재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미 측은 그가 2022년 UAE에서 추방돼 중국 단둥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그를 체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WSJ는 전했다. 중국 외교부는 “심현섭의 활동에 대해 알지 못하며, 일방적인 미 재무부의 제재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WSJ에 보냈다.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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