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은행원 미스터 뱅크스
서울의 대기업 다니는 김낙수
가족 부양하며 살아가는 가장
고독한 현실 서늘하게 다가와
한국 동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디즈니 영화 ‘메리 포핀스’의 삽입곡이었다. 제목은 ‘침 침 체리(Chim Chim Cher-ee)’. 굴뚝(chimney) 청소부의 소박한 낙관을 담은 왈츠로, 1965년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
배경은 1910년대 런던이다. 하늘에서 우산을 타고 내려온 유모 메리 포핀스가 뱅크스가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와 함께 판타지 문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영화는 춤과 노래, 환상으로 가득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아버지 미스터 뱅크스는 이름 그대로 철저한 은행원이다. 사건은 그가 어린 아들 마이클을 일터인 은행에 데려가며 시작된다. 노회한 은행장이 복리의 마법 운운하며 아이의 동전을 뺏으려 한 것이 화근이었다. 돈을 돌려달라는 아이의 외침에 놀란 고객들이 앞다투어 예금 인출에 나서며 뱅크런으로 번진 것이다. 늦은 밤 은행에 불려 간 미스터 뱅크스는 차갑게 해고된다. 뮤지컬 영화의 밝은 외피 속에 자본주의의 냉혹함과 실직의 공포라니, 뜻밖의 전개다.
영화 한 편을 더 보자. 2013년 개봉한 ‘세이빙 MR. 뱅크스’는 1964년 작 ‘메리 포핀스’가 탄생하기까지의 뒷이야기를 그렸다. 깐깐한 원작자 파멜라 트래버스와 그녀를 설득해 영화를 완성하려는 월트 디즈니의 집요한 노력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런데 트래버스는 내내 불편해한다. 영화가 선과 악을 가르며 엄격한 아버지 미스터 뱅크스를 악역으로 몰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 트래버스는 굳은 표정으로 월트 디즈니에게 묻는다. “메리 포핀스가 아이들을 구하러 왔다고 생각하나요?”
이 질문은 대화의 상대인 월트 디즈니는 물론 지켜보던 관객 모두의 허를 찌른다. 나 역시 무심코 넘겼던 영화의 제목을 그제야 떠올렸다. 세이빙 MR. 뱅크스(미스터 뱅크스 구하기). 메리 포핀스 마법의 본질은 결국, 삭막한 일터에 매몰되어 있던 가장을 다시 가족의 품에 되돌려놓은, 절박한 구원이었던 것.
여기엔 트래버스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숨어있었다. 실제로 은행원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실직 후 경제적 곤궁과 알코올 의존에 무너졌고, 어린 트래버스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구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바랐던 어린 소녀의 소망 속에서 메리 포핀스 캐릭터가 태어난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 위로 흐르는 1961년 트래버스 부인의 육성은 그래서 더 뭉클하다. “어쨌든 강조해 줘요. 뱅크스씨가 유능하고 자상하고 성실했다는 걸.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삶에 지쳐있긴 했지만.”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는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 “가족극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포물”이라는 평이 따라붙는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이라는 사회적 훈장으로 버텨온 삶이 한순간 고꾸라지는 과정이 지독할 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젊을 땐 앞만 보고 달리라던 세상이 이제는 주변도 돌아보고 자기 자신도 좀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막상 멈춰 서 보면 어떨까. 드라마 속 김 부장의 고백을 들어보자. “막상 내 안을 들여다보면 내가 없어. 공허해, 텅 비었어. 주변을 보면 다 내 등 뒤에 타 있어. 부모님, 대출, 노후….” 1910년대 런던의 은행원이든 2020년대 서울의 대기업 부장이든 다르지 않다. 가족을 부양하며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가장들의 고독은 연말의 들뜬 공기를 뚫고 더욱 서늘하게 다가온다.
어릴 때 듣던 동요가 생각난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아이들을 위한 동요가 왜 어른들의 고단함을 노래하고 있는 걸까. “햇님 보면서 짝짜꿍 도리도리 짝짜꿍, 우리 엄마가 웃는다 우리 아빠가 웃는다.” 재롱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 뒤로 부모의 한숨과 주름살이 비치는 가사가 사뭇 애잔하다. 메리 포핀스가 그랬듯 이 노래의 위로도 결국 어른을 향해 있다.
연말이다. 반짝이는 거리 한편, 조용히 한숨을 삼키는 이 시대의 미스터 뱅크스와 김 부장들이 있다. 두 작품의 결론은 어떻게 됐을까. 미스터 뱅크스는 어린 트래버스가 현실에선 이루지 못했던 바람대로, 더 이상 차가운 은행원이 아닌 따뜻한 아빠로 돌아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연을 날린다. 서울 자가도, 대기업 부장이라는 지위도, 체면도 허세도 다 잃은 김 부장에게 남은 것 또한 결국 가족의 온기다. 구름 위 판타지로 시작해 지독한 현실의 밑바닥을 지나온 이 이야기들이 도달한 곳. “넌 왜 그렇게 짠하냐?”라는 김 부장 부인의 한마디가 허전한 마음들을 다독이는 겨울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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