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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5 (월)

    美 대통령, 부시 아닌 고어였다면…북핵 문제 달라졌을까[남북은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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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 남북 정상회담 후 한반도 훈풍…부시 당선으로 정세 급변

    제네바 합의 무효화 없었다면…북미 정상회담 당겨졌을 가능성도

    [편집자주]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고 한다. 하지만 북핵 위기와 이념 갈등, 대화와 반목을 반복한 남북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때 이랬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남북이 놓친 '극적인 순간'으로 돌아가, 오늘의 위기를 기회로 되돌릴 지혜를 탐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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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경의선 남측 최북단 도라산역을 둘러보는 모습.(출처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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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1998년 시작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Sun-shine Policy).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한반도 문제 해결의 '운전대'(핸들)를 한국이 잡으면 미국은 '조수석'에 앉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북한이 1998년 8월 31일 자신들의 첫 인공위성이라 주장한 '광명성 1호'를 발사체 '대포동 1호'에 탑재해 발사하면서, 미국은 대북 정책 전반을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위성 발사체를 확보했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장거리미사일 개발 가능성이 커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8년 11월 23일 북한 문제를 다룰 미국 측 수석대표인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임명했고, 같은 해 12월 페리 조정관은 한국을 방문해 김 대통령과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을 만났다.

    당시 한미는 180도 결이 다른 다른 대북 구상을 수립했다고 한다. 12월 7일 청와대에서 페리 조정관을 만난 김 대통령은 북한과의 긴장을 고조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시간 넘게 그를 설득했지만, 페리 조정관은 정부가 기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김 대통령은 이듬해 1월 임동원 수석을 미국으로 급파했다.

    페리 조정관은 훗날 임 수석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내 생각과 (한국의 생각이) 너무도 달라 어안이 벙벙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한국의 의견을 경청했다. 놀라운 이야기는 북핵 구상의 한 이정표를 찍은 '페리 프로세스'에 대한 그의 소회다.

    페리 조정관은 "부끄럽지만, '페리 프로세스'라는 것은 임동원 수석의 전략 구상을 도용하고 표절해 미국식 표현으로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이 핵 개발 중단 조치를 하면 미국 등 관련국들이 단계적 보상을 하되, 북한이 핵 개발 중단을 거부하거나 중도에 포기할 경우 강력한 조처를 한다는 것이 골자로, 1999년 3월에 한미가 최종 합의하고, 미국 의회에 정식으로 보고된 북핵 문제 해결 전략이다.

    페리 조정관은 1999년 5월 북한을 방문했고, 이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이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면하며 북미 수교 가능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0년엔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며 북핵 문제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美 정권 교체와 함께 뒤집어진 정세…부시 '악의 축' 발언으로 갈등 극심

    2000년 11월 7일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클린턴의 기조를 이어받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를 전국 득표에서 앞섰다. 고어 후보는 5099만 9897표를 득표했고, 부시 후보는 5045만 6002표를 얻었다. 하지만 각 주별 선거인단 확보가 더 중요한 미국 대선의 특성으로 인해, 승리는 부시 후보자의 것이었다.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는 부시 대통령의 대북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북한을 비롯한 '스트롱맨'(독재자)가 집권하는 체제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규정했다. 북한은 이를 '선전포고'라고 비난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며 관계는 경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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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윌리엄 페리 대북 조정관을 만나고 있다.(출처 국가기록원)


    美 설득 지속했지만…2003년 北의 NPT 탈퇴로 북핵 위기 고착

    김대중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부시 정부를 설득했다. 그는 2002년 2월 20일 방한한 부시 대통령에게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설명하며 왜 대북 접촉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피력했다고 한다. 또 그를 남한의 최북단 기차역인 '도라산역'으로 초청해 남북 단절의 현장을 볼 수 있게 했다. 그해 8월 남북은 경의선·도로 연결, 개성공단 발전 문제, 임진강 수해 방지 등을 논의할 '2차 경제협력 회의'를 열 수 있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대북 협상의 언어는 대화와 협력에서 '억지·압박'으로 심화했다. 부시 행정부의 핵심 세력인 신보수주의자(네오콘·neo-conservatism)들의 대북 인식에 따라서다. 남북 협력 및 화해의 움직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해 가을엔 '제네바 합의'가 사실상 무효화 되는 일들이 이어졌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2002년 11월 14일 대북 중유(heavy fuel oil) 공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북한은 2002년 12월 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단 철수를 요구했고, 2003년 1월 10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북핵 위기가 고착화됐다.

    한반도에 가장 중요한 변수는 아직 '미국'…남북미 '선순환' 중요

    남북관계는 국제정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미국이다. 26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북핵 문제가 고착화되면서 미국의 중요성도 더욱 커졌다. '남북관계'라는 남북 양자 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도 이제 미국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북한 문제가 외교의 영역으로 대부분 옮겨간 것이다.

    지난 26년 전 미국의 대통령으로 부시가 아닌 고어가 당선됐다면, '햇볕정책'에 따른 한반도의 평화도 더 오래갈 수 있었을까? 북한과 미국의 첫 정상회담이 2018년이 아닌 2000년에 열릴 수 있었을까? 북핵 문제가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된 듯한 이 시점에 상상해 보는 지나간 과거다.

    somangcho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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