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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2월 16일 오전 11시 30분. 부산 수영비행장을 이륙한 대한국민항공사 소속 여객기 ‘창랑호’는 서울 여의도비행장을 향해 순항 중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뒤인 낮 12시 40분경. 평택 상공에서 기체는 돌연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북한 평양 순안비행장. 군사분계선을 넘어 강제 착륙한 이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사건, 이른바 ‘창랑호 납북 사건’으로 기록됐다.
◇남파공작원 5명·조력자 2명의 합작…‘의거입북’ 주장하는 북한=당시 항공기에는 승객 29명과 승무원 3명 등 총 34명이 탑승해 있었다. 기장과 부기장은 모두 미국인이었고, 미군 군사고문단 소속 중령과 독일인 부부 등 외국인도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7일 언론을 통해 이를 ‘의거입북(義擧入北)’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중국 총리의 평양 방문 시점과 맞물려 북한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월 22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회에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유엔군 측에 협조를 요청했다. 유엔군은 24일 북한에 승객과 승무원,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
사건 발생 18일 만인 3월 6일. 납치범을 제외한 승객과 승무원 26명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하지만 항공기는 끝내 반환되지 않았다.
경찰은 김택선·길선 형제, 김순기, 김형, 최관호 등 남파공작원 5명과 김애희·김미숙 등 월북동행자 2명을 납치범으로 발표했다. 기덕영 등 3명은 공작 배후 혐의로 체포됐으나, 기덕영을 제외한 2명은 무죄로 석방됐다. 납치범들이 월북한 탓에 사건의 전모를 완전히 규명하지 못해서다.
기체를 돌려받지 못한 대한국민항공사는 이후 DC-3형 쌍발기와 콘스텔레이션 749A 4발 여객기를 도입해 국내선과 국제선 노선을 보완했다. 그러나 기체 손실 비용과 운영 부담으로 장기간 경영난을 겪어야 했다.
여객기 납북 사태와 자금난이 겹치면서 대한국민항공사는 결국 파산했다. 정부는 회사를 인수해 1962년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출범시켰다.
이후 정부는 민영화를 결정하고 한진상사 대표였던 고(故)조중훈에게 인수를 제안했다. 그렇게 1969년 3월 1일 회사는 대한항공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 출발을 했다.
◇11년 뒤 또다시…1969년 ‘KAL기 납치’=북한의 공중 납치는 11년 뒤 다시 벌어졌다. 1969년 12월 11일 낮 12시 23분 강원도 강릉을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여객기 YS-11A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됐다. 이륙 10분만이었다.
대관령 상공에서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으로 위장한 고정간첩 조창희가 권총을 들고 갑자기 조종실로 뛰어들었다. 총성은 울리지 않았지만 기수는 곧장 북쪽으로 꺽였다. 여객기는 휴전선을 넘어 북한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다.
그러자 긴급 출동한 북한기 2대가 선덕비행장으로 유도했다. 착륙 직후 조창희는 가장 먼저 기체에서 내려 대기 중이던 검은 세단차를 타고 사라졌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2일 북한은 착륙 지점조차 밝히지 않은 채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고 주장하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창랑호 납북 사건’에 이어 두 번째 민항기 납치였다.
당시 항공기에는 승무원 4명과 승객 46명, 납치범 1명 등 총 51명이 탑승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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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22일 판문점에서는 유엔군 측 요청으로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가 열려 승객·승무원과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유엔군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거부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인도·파키스탄·멕시코 등 15개국 적십자사를 통해 중재를 시도했고, 세계 12개 주요 민간항공회사도 북한의 항공기공중납치사건을 규탄했다. 국내에서도 전국 23개 지역에서 규탄 집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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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69년 12월 24일 ‘조종사 환영 시민대회’를 열어 선전전에 나섰고, 엉뚱하게도 민간단체 간 송환교섭단 구성을 제의했다. 이후 납치 55일 만에 승객을 송환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북한은 약속한 1970년 2월 4일(구정 전날) 송환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납치 66일 만인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납치범 1명을 제외한 승객·승무원 50명 가운데 39명만 귀환했다. 승객 7명과 승무원 4명은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했다.
김도연 AX콘텐츠랩 기자 dorem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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