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 가끔 현실을 본다. 영화 속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허구이지만, 영화는 또한 현실을 생생히 비추는 거울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인 2008년, 서울의 한 경찰서 외사과에서 들은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기자양반, 시간 되면 차나 한 잔 할까요”라며 필자를 이끈 그 경찰은 스스로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건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범죄의 실상에 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엄숙한 어조로 우려를 표했다.
우리의 법과 제도를 뛰어넘는 거대한 국제범죄 스케일에 당시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이런 국제범죄들이 방치되면 국민들에게 큰 피해가 갈 거라며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필자는 잠시 ‘언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었다. 하지만 곧 다음 일정이 있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너무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영화로 만들어도 될 소재 같아요.” 머뭇거리다 꾸벅 인사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그날 이후로 그 경찰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무거운 짐으로 남았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극장에서 영화를 기다리다 이상한 예고편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영화 제목이 ‘마린보이’(2009)였는데, 영화에 나오는 범행 수법이 그 경찰이 말한 것과 흡사했다. 그리고 또 1년쯤 지나 개봉한 영화 ‘황해’(2010)를 마주하고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영화는 외사과 경찰이 말한 바로 그런 사건들의 이야기였다. 영화 제작은 아무리 빨라도 1~2년은 걸린다. 영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들은 필자가 그 경찰로부터 국제범죄 이야기를 듣기 전 이미 사건을 인지하고 취재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가 현실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영화라는 상업예술의 목적 중 하나는 흥행이다. 현실과 무관한 뜬금 없는 이야기를 잘못 영화화했다간 큰 실패에 처할 수도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휴민트’를 보면서 이 영화에 녹아들었을 수많은 실제 사건들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벌어지는 북한 여성 인신매매와 남북 정보기관의 첩보전에 대한 이야기다.
대단한 배경 지식은 생각보다 필요치 않다. 검색 포털에 ‘블라디보스톡 암살’ 정도의 키워드를 넣기만 해도 충분하다. 1996년 10월 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근무하던 최 모 영사(국정원 소속)가 귀가 중 북한 요원 3명에 의해 칼, 도끼, 독침으로 무참히 살해된 실제 사건 보도가 검색된다.
다시 ‘북한 여성 인신매매’를 검색하면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서 북한 여성 인신매매가 매우 활발히 이뤄져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블라디보스톡 마약’이라고 쳐보면 불과 수 년 전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부산항으로 마약을 밀반입하려다 검거된 사건 보도가 나온다. 우리가 영화만큼 참혹한 현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영화 ‘휴민트’의 류승완 감독은 ‘북한 여성 인신매매’를 소재로 삼은 계기에 대해 “너무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라며 “취재 과정에서 실제로 들었던 이야기인데, 서술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고 말했다. 12.3 계엄사태 속에서 국민들은 현실이 영화보다 더 극적임을 느꼈다. 영화가 가끔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너무 현실에 가깝기 때문 아닐까.
김수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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