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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7 (금)

    석탄 나르던 길 위로 구름 양탄자가 깔렸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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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갱도 품던 '운탄고도' 굽이굽이

    폐석 더미 뚫고 은빛 자작나무 수만 그루 합창

    갱도 무너진 자리 도롱이연못

    광부 아내들 기도 서린 눈물로 채운 듯

    거친 엔진소리 대신 새소리만 가득

    대지가 스스로 써 내려간 회복 기록

    [정선(강원도) 글·사진=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강원도 정선의 함백산 능선. 해발 1100m 고원의 바람은 날이 선 서릿발 같다. 폐부를 찌르는 공기는 차갑고 정직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깊숙이 박히는 알싸한 냉기는 이곳이 대한민국 산업화의 최전선이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불과 수십 년 전, 이곳은 검은 탄가루가 구름처럼 몰려다니고 산천의 모든 생명이 잿빛으로 질려 있던 ‘검은 땅’이었다. 광부들의 거친 숨소리와 석탄 트럭의 육중한 굉음이 지배하던 그 척박한 폐광지가 이제 눈부신 하얀 덧칠을 하고 스스로를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부른다. 이번에 소개하는 곳은 강원랜드 마운틴콘도에서 출발해 함백산 능선에 자리한 자작나무숲을 거쳐 하늘길 능선, 도롱이연못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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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원 무릉도원 자작나무숲의 중심부 눈 덮인 자작나무숲은 하얀 나무줄기와 눈빛이 구분되지 않는 완벽한 순백의 세계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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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만 그루의 자작나무사 일제히 하늘을 향해 창끝처럼 솟구쳐 있는 ‘무릉도원 자작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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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석 더미 뚫고 솟구친 ‘백색의 제국’

    트레킹의 시작과 함께 여행자를 압도하는 것은 무릉도원 자작나무숲이다. 수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창끝처럼 솟구쳐 있다. 누군가 백색 물감을 듬뿍 묻힌 붓으로 매끈하게 칠해 놓은 듯한 수피(樹皮)가 눈부시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겨울 햇살이 비껴들면 숲은 투명한 유리 사원(寺院)처럼 변한다. 얇은 종이처럼 일어나는 자작나무 껍질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마치 숲이 건네는 고요한 증언처럼 들린다.

    본래 이곳은 함태탄광의 폐석 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버려진 땅이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기 힘들 것 같던 척박한 돌무더기 위로 20여 년 전부터 자작나무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거친 돌무더기 사이로 여린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독한 탄가루를 정화하며 스스로 제국을 건설했다. 자작나무의 흰 껍질은 이 땅의 검은 과거를 기어이 씻어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읽힌다. 어둡고 습한 탄광의 갱도 대신 수만 개의 하얀 기둥이 지탱하는 ‘백색의 성소’가 들어선 셈이다. 이는 산업화의 상처를 자연의 생명력으로 치유한, 대지가 스스로 써 내려간 위대한 회복의 기록이자 자연이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화려한 화해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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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백산 정상에서 등산객이 해발 1100m 이상의 장쾌한 풍광을 가진 하이원 하늘길과 운탄고도의 설경을 바라보고 있다. 하이원 하늘길과 운탄고도는 과거 탄광 시절의 역사와 현재의 치유가 공존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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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꺼진 자리에 고인 간절한 기도

    백색의 숲을 빠져나와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은 리조트의 ‘하늘길’이자 영월에서 삼척까지 잇는 해발 1100~1330m의 장대한 걷기 길인 ‘운탄고도 1330’의 핵심 구간이다. 한때 무거운 석탄을 실어 나르던 먼지 자욱한 트럭의 길 ‘운탄’(運炭)이 이제는 구름을 타고 걷는 평탄한 길 ‘운탄’(雲坦)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거친 엔진 소리와 탄가루 섞인 바람 대신, 이제는 등산화가 자갈을 밟는 소리와 이름 모를 산새들의 청아한 울음만이 공기를 채운다.

    그 길의 끝에서 대지의 깊은 흉터와 마주한다. ‘도롱이연못’이다. 이름은 정겹고 소박하지만 그 기원은 처절하다 못해 숭고하다. 1970년대 지하 막장에서 검은 금을 캐내던 갱도가 무거운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지표면은 맥없이 함몰됐고, 그 거대한 구덩이에 빗물과 눈물이 고여 연못이 됐다. 지표가 가라앉은 자리에 물이 고인 이 연못은 대지가 입은 깊은 내상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눈물로 채운 웅덩이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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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롱이 연못. 갱도 함몰로 생긴 대지의 상처가 이제는 생명을 품은 평온한 호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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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엔 광부 아내들의 애달픈 서사가 켜켜이 서려 있다. 남편을 어두운 지하 갱도로 보낸 여인들은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도롱뇽(도롱이)을 찾았다. 차가운 물 속에서 도롱뇽이 활발히 살아 있으면 남편도 지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광부의 생사가 미물의 움직임 하나에 달려 있던 시절, 연못은 아픔이자 기적의 장소였다. 이번에 찾은 연못은 겨울 끝자락을 붙잡고 꽁꽁 얼어붙어 있었으나, 그 투명하고 두꺼운 얼음 밑엔 봄을 기다리는 도롱뇽의 강인한 생명력과 수만 번 반복됐을 여인들의 기도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땅이 꺼진 아픔을 스스로 채운 이 연못은 하늘길 위에서 만나는 가장 낮고도 따뜻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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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산 자락에 자리한 도롱이연못의 겨울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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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전령을 기다리는 숲의 정적

    이 코스는 트레커들이 나만 알고 싶은 장소로 아껴둔 ‘비밀의 화원’이다. 인제 원대리 등 유명 자작나무 숲들이 인산인해를 이룰 때도 이곳은 해발 1100m라는 지리적 무게와 고립감 덕분에 인적 드문 고요를 지켜왔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붉은 표지기들은 낯선 길 위에서 여행자를 안심시키는 유일한 인공의 이정표이자 숲의 야생성과 조화를 이루는 길잡이다.

    겨울 끝자락, 봄의 전령이 도착하기 전의 숲은 비장하다. 발밑의 잔설은 서걱거리며 계절의 경계를 알리고, 잎을 틔우기 전의 나무들은 제 몸의 하얀 광채를 가장 극명하게 뿜어낸다. 만물이 잠든 듯한 정적 속에서 나무들은 다음 계절을 위한 수액을 비밀스럽게 끌어올리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 심장부의 평상에 앉아 씻어낸 일상의 피로를 뒤로하고 도롱이 연못의 얼음이 녹기를 기다린다. 연둣빛 싹이 돋을 때쯤, 이곳은 다시 한번 완벽한 무릉도원으로 거듭날 것이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하얀 나무들과 남편의 안녕을 빌던 연못의 서사는 그 자체로 숭고한 인생의 한 장면이다. 자작나무의 꼿꼿한 흰 줄기는 상처 입은 대지가 하늘을 향해 뻗치는 희망의 촉수와도 같다. 하이원 무릉도원 자작나무숲과 도롱이 연못은 이제 아픈 과거를 넘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서로를 치유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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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원 무릉도원 자작나무숲의 중심부 눈 덮인 자작나무숲은 하얀 나무줄기와 눈빛이 구분되지 않는 완벽한 순백의 세계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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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정보

    ▶찾아가는 길: 강원 정선군 사북읍 하이원길 265 (하이원리조트 마운틴콘도 인근 하늘길 입구에서 트레킹 시작)

    ▶트레킹 코스: 마운틴콘도 → 무릉도원 자작나무숲 → 하늘길 능선 → 도롱이 연못 (왕복 약 2~3시간 소요, 완만한 오르막과 평탄한 능선 구간이 반복된다.)

    ▶준비물: 해발 1100m 이상 고지대다. 평지보다 기온이 월등히 낮고 칼바람이 강해 방한 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 초봄에도 잔설이 남아 있어 아이젠과 방풍 재킷은 필수다. 도롱이 연못 주변 습지는 지반이 약해 미끄러짐에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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