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3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대서양 한복판. 미 해군 플레처급 구축함들을 앞세운 연합군 함대가 100여 척의 상선을 지키려고 독일 U보트 잠수함 40여 척과 사투를 벌였다. 22척의 상선을 잃었지만 끝내 보급로를 지켜낸 이 ‘대서양 전투’는 2차 대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2020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그레이하운드’에서 함장 역할을 한 배우 톰 행크스가 보여준 처절한 사투가 긴 세월을 건너뛰어 중동 호르무즈해협에서 재연될 조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혁명수비대의 해협 봉쇄 위협에 맞서 “미 해군이 유조선 호위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2차 대전 때 상선들을 호송했던 컨보이 시스템(convoy system)의 부활이다. 과거 U보트의 어뢰 공격이 연합군의 숨통을 조였다면 지금은 이란 자폭 드론과 미사일이 공포의 대상이다. 이미 10여 척의 선박이 피격됐고 한국 국적 26척 등 총 750여 척이 인근 해역에서 숨죽인 채 대피 중이다.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 특히 한국 수입 원유의 70%가 지나는 이 좁은 해협이 봉쇄된다는 것은 세계경제의 동맥이 막히는 셈이다. 시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중동·아시아 스폿 운임은 며칠 새 3배 넘게 치솟았고 물동량은 80% 급감했다. 해상 운임이 선원들의 ‘목숨값’이 돼버린 것이다.
개전 이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15% 넘게 급등했고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배럴당 100달러 돌파는 시간문제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온다. 고유가는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이는 금리와 소비에 직격탄을 날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정부와 기업은 만반의 태세를 갖춰야 한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상선 호송 작전 과정에서 독일의 암호 체계 ‘에니그마’를 확보하며 승기를 잡았듯이 우리도 치밀한 정보력과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 수급선 다변화도 그렇지만 국가 전략 비축유 점검과 비상 물류 루트 확보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한영일 논설위원 hanu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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