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만에 내한한 고음악 거장
英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
3일 예술의전당에서 바흐의 종교곡 ‘b단조 미사’를 지휘한 영국 거장 존 엘리엇 가디너. 60여 년간 바로크 음악의 재조명에 앞장섰지만 2023년 젊은 남성 성악가 폭행 사건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StudioG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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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흠결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지난 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영국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82)의 내한 공연을 앞두고 조금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디너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재학 중인 1964년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창단하고 몬테베르디·바흐·헨델의 바로크 음악을 60여 년간 지휘한 고음악의 거장. 지난 2000년에도 바흐 종교곡인 칸타타 전곡을 전 세계 60여 곳의 교회에서 연중 공연하는 ‘바흐 음악 순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23년 프랑스에서 오페라 공연 직후 젊은 남자 성악가의 얼굴을 때린 사건으로 논란을 빚었다. 당시 가디너는 이 성악가가 무대에서 반대 방향으로 퇴장하는 모습을 보고 격분해서 폭행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가디너는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자숙하다가 1년 뒤인 2024년 ‘컨스텔레이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창단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22년 만의 내한이자 복귀 이후 첫 방한이기도 했다. 과연 빼어난 음악성과 괴팍한 성격 사이에서 어디쯤에서 접점을 찾아야 할까.
이날 연주곡은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말년 걸작 종교곡인 ‘b단조 미사’.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가디너의 모습에 입장 때부터 따뜻한 박수가 쏟아졌다. 이날 가디너는 별도의 지휘대 없이 그대로 무대에서 지휘하며 단원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지휘봉도 없이 맨손으로, 보면대(譜面臺)도 없이 악보를 외워서 지휘했다.
이날 악단의 악기들도 흔히 보는 현대식 오케스트라들과는 달랐다. 바이올린은 금속 현(絃) 대신에 양의 창자를 정제해서 만든 ‘거트(gut) 현’을 사용했고, 플루트는 황금빛 금속 대신에 적갈색 목재였다. 트럼펫·호른 같은 금관 악기도 지금처럼 밸브가 달린 개량 이전의 투박한 모습이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첫 곡 ‘키리에(Kyrie)’부터 담백하면서도 정감 있는 소리가 울렸다. 작곡가 당대의 악기와 연주법을 충실하게 되살린 ‘시대 연주’로 바흐를 연주하는 모습에 ‘바로크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했다.
3일 공연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목관 악기와 류트 등으로 연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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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건 비단 악기만이 아니었다. 소프라노·베이스 같은 독창자들도 무대 앞이 아니라 합창단과 뒤섞여서 합창까지 함께 불렀다. 자신의 독창이나 이중창 차례가 왔을 때만 잠시 지휘자 곁으로 나와서 노래한 뒤 다시 합창단으로 돌아갔다. 지금처럼 독창과 합창의 영역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옛 방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악단의 악기들도 독주(獨奏) 차례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했고 합주가 되면 다시 앉았다. 1부 마지막에는 첼로·더블베이스 등 일부를 제외한 단원 대부분이 동시에 일어서서 연주하면서 장관을 펼쳤다. 음악 칼럼니스트 이준형씨는 “다채로운 음향과 섬세한 셈여림, 긴 호흡, 회화적인 묘사가 돋보였고 합창단의 노래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서로 조화를 이뤘다”고 평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가디너는 한 편의 오페라처럼 대담하게 합창단의 동선(動線)까지 직접 연출했다. 3부 도입부에서는 한가운데를 비워둔 채 합창단이 둘로 나뉘어 노래하면서 바흐의 이중 합창을 시각적으로도 표현했다. 또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노래한 2부 가운데 십자가의 고난에서는 악단 연주도 서서히 숨죽이듯이 잦아들다가 부활 장면에서 일제히 폭발하듯이 터뜨리면서 청각적으로도 명암(明暗) 대비 효과를 빚었다. 강해근 한양대 명예교수는 “종교곡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엄숙하게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양한 동선과 연출을 통해서 극적 효과를 끌어올린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자비와 평화를 갈구하는 바흐의 종교곡이 과연 가디너의 ‘반성문’인지,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인지는 여전히 알쏭달쏭했지만 ‘문제적 명연(名演)’임에는 틀림없었다. 2시간여 연주가 끝난 뒤 한국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자 ‘내년 12월 베토벤 교향곡 전곡 방한 연주’를 알리는 영어 안내문이 무대 뒤에 떴다. 가디너는 손가락으로 그 안내문을 가리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문제적 노장’을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았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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