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의 한 여성이 스마트폰으로 강남의 성형외과를 검색한다. 마음에 드는 병원을 찾았지만,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한국어를 모른다. 병원에 직접 연락할 방법이 없다. 주변에 물어보면 누군가가 '아는 사람'을 소개해준다. 브로커다.
병원을 소개해 준다는 이유로 시술비의 30~50%가 수수료로 붙는다. 한국 병원은 비자 발급을 위한 초청장을 보내기 전에 시술비의 절반을 선결제로 요구한다.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돈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계약서는 종이 한 장이거나, 아예 없다. 분쟁이 생기면 어느 나라 법을 적용해야 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자브흘란 렌첸도르지(Жавхлан Рэнцэндорж)는 이 구조에서 기회를 봤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뒤 13년간 대학에서 IT를 가르치면서, 창업 경력만 15년인 인물이다. 미국 델라웨어에 법인을 설립하고 캐터필러(Caterpillar)와 파트너십을 맺었던 경험이 있다. 국경을 넘는 비즈니스의 마찰 비용을 몸으로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공동창업한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 LLC)의 서비스 이름은 E-Geree(이거리)다. 몽골어 '게레(гэрээ)'는 '계약'을 뜻한다. 유목민의 집을 뜻하는 '게르(гэр)'와 같은 울림을 가진 말이다. 초원에서 게르를 세우려면 여럿이 함께 벽을 들어 올려야 하듯, 국경을 넘는 계약도 양쪽이 함께 세워야 한다.
E-Geree는 이미 몽골에서 증명된 솔루션이다. 정부 기관과 공립 학교를 포함해 3,500개 이상의 기관이 사용하고 있으며, 처리된 계약은 200만 건에 가깝다. 인구 345만 명인 나라에서 이 수치는 사실상 국가 인프라다.
2024년 몽골 10대 디지털 프로젝트에 선정됐고, IEEE 국제 학술 컨퍼런스에 사례 연구 논문이 게재됐다. 스타트업 월드컵 몽골 리저널 3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스타 벤처 프로그램 5위 등 국제 무대에서도 이름을 올렸다. 2025년 12월 한국 법인을 설립했다. 첫 번째 적용 분야는 의료관광이다.
3,055억 원의 그림자
한국 의료관광 시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2024년 한 해 동안 117만 명의 외국인 환자가 한국을 찾았다. 역대 최대 실적이다. 외국인 환자와 동반자가 한국에서 지출한 금액은 총 7조 5,039억 원. 그중 몽골은 3,055억 원으로 중국, 일본, 미국, 대만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이 숫자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인구 14억의 중국이 1위고, 인구 345만의 몽골이 5위다. 1인당 의료관광 지출 강도로 따지면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실제로 몽골 환자의 1인당 카드 사용액은 367만 원으로 집계됐다.
2024년 방한 몽골 환자는 약 2만 5천 명. 전년 대비 16.5% 증가하며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몽골 전체 인구 중 매년 약 8만 명이 해외 의료관광을 떠나는데, 한국은 그중 가장 중요한 목적지 중 하나다. 진료 과목별로 보면 피부과와 성형외과가 압도적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구조다. 눈, 코, 가슴 성형 시술을 받으러 오는 몽골 환자들이 한국 병원과 직접 연결되기는 어렵다. 언어 장벽, 비자 절차, 결제 시스템의 차이. 그 사이를 브로커가 메운다. 보건복지부도 불법 브로커에 의한 과도한 유치 수수료와 진료비 부풀리기를 한국 의료의 신뢰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해왔다. 유치 수수료 상한선을 진료비의 30%로 제한하는 고시를 시행하고 있지만, 비공식 채널을 통한 거래는 여전하다.
자브흘란이 주목한 건 이 구조의 본질이다. 브로커가 수수료를 올리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브로커 없이는 거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브로커는 언어를 통역하고, 병원을 연결하고, 비자 절차를 안내하고, 결제를 중개한다. 이 모든 역할을 한 사람이 독점하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
"환자는 병원을 직접 찾을 방법이 없고, 병원은 환자의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계약은 불투명하고, 분쟁이 생기면 어느 나라의 법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이 모든 것이 브로커에게 힘을 실어주는 구조입니다."
서명이 아니라, 인프라
E-Geree는 단순한 전자서명 도구가 아니다. 자브흘란은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DocuSign이나 CoSign과 가장 큰 차이는 AI와 블록체인을 동시에 결합했다는 점입니다."
이 주장이 허언이 아닌 이유가 있다. E-Geree 이전에 이 팀은 몽골 최초의 NFT 마켓플레이스 '옥타곤(Octagon)'을 만들었다. 몽골국립대학교 졸업장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저장하는 '호크 NFT'를 발행했고, 몽골 농구 올스타전 선수 선발에 DAO 투표 시스템을 도입했다. 블록체인의 실용적 가치가 "변경하거나 삭제할 수 없는 안전한 계약"에 있다는 확신은, 이 과정에서 나왔다.
이 말을 풀어보면 이렇다. 한국 병원이 몽골 환자와 계약을 체결한다고 하자. E-Geree의 AI는 먼저 양국의 법적 요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계약서를 작성한다. 400명 이상의 변호사가 참여해 만든 250개 이상의 법률 템플릿이 그 기반이다. 같은 계약서가 한국법과 몽골법 양쪽에서 효력을 갖도록 설계된다. 다음으로 AI가 번역을 수행하는데, 단순 기계 번역이 아니다. 계약서 내 조항과 법적 용어의 맥락을 이해한 상태에서 번역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양국 법·제도 사이에 공백이나 불일치가 있을 경우 이를 짚어내고 수정 방향을 제안한다. 한국에서는 유효하지만 몽골에서는 효력이 없는 조항,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AI가 미리 잡아낸다는 뜻이다.
모든 계약서는 블록체인에 저장된다. 모든 당사자가 서명을 완료한 이후에는 수정이나 삭제가 불가능하다.
가장 큰 강점은 국가 단위의 디지털 서명 시스템과 이미 연동되어 있다는 점이다. 몽골 정부가 운영하는 'KHUR'과 'DAN' 시스템, 즉 국가 정보 교환 체계와 디지털 신원 인증 체계에 통합되어 있다. 우연이 아니다.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CPO 바트바야르(B. Batbayar)가 몽골의 국가 디지털 인프라 '이몽골리아(e-Mongolia)' 개발에 직접 참여했던 엔지니어다. 정부 시스템의 내부 구조를 아는 사람이 팀 안에 있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디지털 서명 체계와도 연동이 완료된 상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DocuSign이 왜 이 지역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지를 봐야 한다.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에서 법적 효력을 가진 전자서명을 하려면 각국 정부의 신원 인증 체계를 거쳐야 한다. 미국 기업이 이 시스템과 연동 협약을 맺고, 각국의 규제 요건에 맞추고, 현지 언어로 법적 템플릿을 구축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시장 규모 대비 투자 유인이 낮기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E-Geree는 그 틈에서 태어났고, 이미 그 장벽을 넘어 있다.
다만 이 기술적 강점은 주로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검증된 것이다. 한국의 전자서명법과 전자문서법 체계에서 E-Geree의 계약서가 어떤 법적 지위를 갖는지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다. 자브흘란도 이를 인식하고 있어 법률 자문단 및 현지 파트너들과 협력하며 한국 규제 환경에 맞추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같은 시술을 받으러 가는 두 명의 몽골 환자를 상상해보자.
한 명은 브로커를 거친다. 브로커가 병원을 소개하고, 가격을 부풀리고, 선결제를 요구한다. 계약서가 있어도 한국어 단일 문서다.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돈이 사라진다. 시술 후 문제가 생겨도 호소할 곳이 불분명하다.
다른 한 명은 E-Geree를 쓴다. 플랫폼에서 이중 언어 계약서가 생성된다. AI가 계약 내용을 양국 법에 맞게 검토하고, 핵심 조항을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요약한다. 양측이 디지털 서명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시술비는 에스크로 방식으로 결제된다. 돈은 플랫폼이 보관하고, 시술이 완료된 후에 병원으로 지급된다. 비자가 발급되지 않으면 환불이 보장된다.
두 번째 경로에서는 브로커가 끼어들 여지가 사라진다. 병원과 환자가 직접 연결되고, 계약 조건이 투명하며, 결제가 보호된다.
"환자는 비용의 투명성을 얻고, 병원은 브로커 수수료를 절감하면서 직접 환자를 확보합니다.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입니다."
현재 두 개의 한국 병원이 E-Geree 플랫폼에 참여하고 있다. 두 병원은 각각 서로 다른 ERP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각 병원의 ERP 플랫폼과 직접 연동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르면 한 달 내로 통합이 완료될 것으로 예상하며, 완료되면 병원은 자사 시스템에서 바로 몽골 환자에게 계약서를 발송할 수 있다. 환자는 몽골에서 디지털 서명으로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의료관광 외에도 움직임이 있다. 한국 법인 등록이 완료되기 전에 부동산·건설 분야에서 유료 계약이 먼저 체결됐다. 플랫폼의 크로스보더 계약 기능이 의료뿐 아니라 복수의 산업에서 수요가 있다는 초기 신호다.
몽골 핀테크 생태계와의 연동도 강점이다. E-Geree 플랫폼에는 다양한 몽골 핀테크 솔루션이 이미 통합되어 있어, 시술비를 일시불 또는 분할 결제로 처리할 수 있다. 현재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를 지원하며, 더 많은 언어가 추가될 예정이다.
신규 시장이 아니라, 전략적 허브
스마트 컨트렉트는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KSGC)를 통해 한국에 진출했다. KSGC는 해외 유망 창업 기업을 발굴해 국내 엑셀러레이팅을 지원하고 국내 창업생태계에 정착을 돕는 중소벤처기업부의 글로벌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참여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흥미로운 전환이다. 몽골에서 한국은 의료관광의 목적지다. 하지만 자브흘란의 눈에 비친 한국은 그 이상이었다. 팀 안에 이미 한국과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스마트 컨트랙트는 4인의 공동창업 체제다. CEO 투굴두르 바야르사이한(Tuguldur Bayarsaikhan)은 법학과 하드웨어 공학 복수 학위를 가진 인물로, 법과 기술의 교차점에서 16년을 일했다. COO 바트바야르(N. Batbayar)는 한동대학교에서 MBA를 이수한 경험이 있다.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와 규제 환경을 체감한 사람이 경영진에 있다는 것은, 이 팀이 한국 진출을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초기에는 한국을 단순히 또 하나의 신규 시장으로 봤습니다. 매니저와 멘토, 파트너들의 피드백을 거치면서 인식이 바뀌었어요. 한국은 아시아 전체를 위한 크로스보더 신뢰 인프라의 전략적 허브가 될 수 있다고."
이 인식의 전환이 실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초 계획보다 이른 시점에 법인 설립, 법적 준비, 현지 인재 채용을 우선순위로 올렸다. 여러 분야를 동시에 공략하려던 전략도 의료관광이라는 하나의 초기 사용 사례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한국 시장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것도 있었다. 한국에는 매우 발전된 국내 전자서명 솔루션들이 이미 잘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간 계약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플랫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경쟁사는 국내 사용에 집중하거나, 서명 기능과 같은 단일 기능에 머물러 있었다. 역설적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를 구축한 나라가, 정작 외국인과의 계약에서는 종이와 브로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한국에서의 기회는 로컬 솔루션과 경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시스템을 연결하는 역할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보수적인 문, 느린 열쇠
이 시리즈를 통해 만난 외국 창업자 대부분이 같은 말을 했다. 한국 시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를 얻는 과정이라고. 자브흘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예상 밖이었던 것은 한국 기관들의 보수성이었다. 새로운 법적·운영 도구를 도입하는 데 대한 문턱이 높았다. 컴플라이언스에 대한 기대 수준도 예상을 넘어섰다.
"병원 관계자들과 7~8곳을 미팅했습니다. 언어 장벽이 첫 번째 허들이었어요.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통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E-Geree를 기존 시스템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기존 워크플로우를 보완하는 인프라 레이어로 포지셔닝하는 것으로 전략을 조정했다. 법률 자문단 및 현지 파트너들과 협력하며 한국의 규제 환경에 정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본사와 한국 법인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조율과 의사결정 속도였다. 시차, 언어 차이, 규제 절차. 해법은 한국 관련 의사결정에 명확한 책임 주체를 지정하고, 프로세스를 철저히 문서화하는 것이었다.
울란바토르에서 서울, 그리고 아스타나까지
자브흘란이 그리는 1년 후의 모습은 이렇다. 한국 법인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수십 개의 기관 고객이 확보되며, 반복적인 계약 물량이 형성되는 것. E-Geree가 한국과 몽골, 더 나아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크로스보더 디지털 계약 플랫폼으로 인식되는 것. 몽골에서 시작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까지 이미 디지털 서명 연동을 완료한 만큼, 한국이 그 네트워크의 서쪽 끝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그림이다.
장기적으로는 의료관광을 넘어 교육과 건설 분야로 확장할 계획이다. 두 번째 타깃으로 주목하는 분야는 대학과 고등학교의 언어 교육 센터, 특히 몽골·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한 교육 기관이다. 건설 산업도 유망하다. 몽골과 한국 양국에서 건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국경을 넘는 거래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계약 인프라의 수요는 분명하다.
의료관광 환자만이 타깃은 아니다. 한국에는 약 5만 명의 몽골 노동자와 1만 명 이상의 유학생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본국의 부동산 매매, 위임장, 금융 거래 등을 위해 수시로 계약이 필요하다. 기존에는 대사관을 방문하거나 본국에 있는 지인에게 대리를 맡기는 방식이었다. E-Geree는 이 과정을 디지털로 대체할 수 있다. 의료관광에서 검증된 크로스보더 계약 인프라가,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의 일상적인 법률 수요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구조다.
다만 현재 한국에서의 실적은 아직 초기 단계다. 두 개의 파트너 병원과의 협업이 실제 운영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과이며, 본격적인 시장 검증은 이제부터다. 몽골에서 200만 건의 계약으로 검증된 인프라가 한국에서도 작동하는지는, 첫 번째 크로스보더 계약 사례가 완료되는 순간 답이 나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물었다.
"투자 유치보다는 협업과 파트너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함께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고 있어요. 본국에 AWS와 Google 인증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있고, 다양한 시스템과의 연동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AI와 블록체인을 결합한 디지털 계약 솔루션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저희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몽골 초원에서 게르를 세우려면 혼자서는 안 된다. 여럿이 동시에 벽을 들어 올려야 원형이 만들어진다. 국경을 넘는 계약도 마찬가지다. 한쪽만 서명하면 종이에 불과하고, 양쪽이 함께 세워야 약속이 된다. 스마트 컨트렉트가 풀려는 문제는 결국 그것이다. 브로커가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 서명이 아니라 신뢰를 짓는 것.
글 : 김문선(english@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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