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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8 (일)

    죽음을 그리는 예술, 영원을 말하다 [김설화의 미술관 가는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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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설화 큐레이터]
    이코노믹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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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을 옥죄는 온갖 굴레에서 우리를 풀어주는 해방의 열쇠로 보았습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대비하는 자만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지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화제가 되면, 마치 외면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듯 그 존재를 일상 밖으로 밀어냅니다. 하지만 외면이 곧 망각은 아닙니다. 죽음을 의식적으로 밀어낼수록 오히려 더 깊은 곳에 가라앉아 인간의 욕망을 움직입니다.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영원을 갈망합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기록하고, 흩어질 시간을 붙잡아 형상을 남기려 합니다.

    어쩌면 예술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가장 숭고한 저항일지 모릅니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소멸의 미학

    16세기에 태동해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꽃피운 바니타스(Vanitas) 회화는 화려한 사물들 사이에 죽음의 징표를 끼워 넣었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포도, 반짝이는 은식기, 비단 식탁보. 그 한가운데 해골이 놓여 있습니다.

    라틴어로 '헛됨'을 뜻하는 이름처럼 그림 속 사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음을 말합니다. 꺼진 촛불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는 생명의 덧없음을, 반쯤 껍질이 벗겨진 레몬은 삶의 달콤함 뒤에 숨은 쓴맛을, 모래시계는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니타스는 죽음을 삶의 이면으로 숨기는 대신, 회피가 아닌 직면을 택했습니다. 죽음을 마주할 때 역설적으로 지금의 삶과 풍요가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대미술이 마주한 죽음의 얼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바니타스의 정신은 다른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호주 조각가 론 뮤익은 죽은 아버지의 몸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해 관람객 앞에 뉘어 놓았습니다. 실제보다 작게 축소된 이 조각은 지나치게 정교해 불편할 정도입니다. 그 앞에서 관람객은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에 서게 됩니다. 일상에서는 외면하던 죽음이 이 작품 앞에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됩니다.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는 거대한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보존해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했습니다. 죽었지만 썩지 않는 존재, 형체는 완전하지만 생명은 없는 존재입니다. 그 앞에서 관람객은 묻게 됩니다. 이것은 죽음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존재일까요?

    그리고 그 질문이 깊어지는 순간 역설이 일어납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가장 또렷해집니다.

    예술은 이렇게 죽음을 말하면서, 실은 가장 치열하게 삶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보는 순간, 삶이 선명해집니다

    예술이 죽음을 가리킬 때 그 손가락 끝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합니다. 몽테뉴가 말한 자유도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를 옭아맬 것이 많지 않습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한다는 것은 끝을 전제로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일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만들고, 언젠가 잊힐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언젠가 스러질 몸으로 여전히 내일을 계획합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늘을 조금 더 또렷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야말로 덧없는(Vanitas) 캔버스 위에서 예술이 남긴 역설적인 생의 찬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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