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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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봄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하늘은 맑고 날은 따스했다. 창문을 한 뼘쯤 열고 싱그러운 아침 바람을 쐬며 새소리를 듣는데 난데없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울 지역에 경계 경보 발령, 경계 경보 발령. 이 경보는 실제 상황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즉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기…….” 소름이 쫙 끼쳤다. 미사일이 날아오나 싶어 창밖을 보니 아침노을 한 줄기가 핏빛으로 선명했다. 마침내 종말이구나. 이 땅에 다시 전쟁이구나. 오, 아름다웠던 날들이여, 안녕. 식빵이며 물이며 닥치는 대로 넣고 피란 가방을 쌌다. 아끼는 물건들, 좋아하는 공간, 읽다가 덮어둔 책, 이게 다 한 줌 재가 된다니……. 한강 다리는 끊겼을까 안 끊겼을까. 20분 뒤 인왕산 초입에서 오발령 문자를 받고 털썩 주저앉아 생각했다. 아아, 전쟁은 절대로 안 돼.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 /엉뚱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모를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몹시도 불행한 사람 /나는 몹시도 모자란 사람……’
요즘 중동 하늘을 날아다니는 미사일을 보며 이 시를 중얼거린다. 윤동주를 사랑해 한글을 배우고 한국 시를 번역해 널리 알리기도 한, 일본의 국민적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시인은 소녀 시절 전쟁을 겪고, 스무 살 되던 해 나라가 패전을 선포한다. 건물이 폭파되고, 아이들이 죽고,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굶주림에 떨고,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모든 걸 잃고……. 지구상에 다시 그런 지옥이 펼쳐지는 요즘, 세계의 마음도 황폐해진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 주지 않으면, 우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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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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