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07 (토)

    종이의 미래 ‘어쩔 수가 없을까?’… ‘30년 종잇밥’ 공장장, 입을 열었다 [인터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헤럴드경제

    정경표 한솔제지 천안공장 공장장이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한 뒤 천안공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종이를 들어 딱 보면 어느 회사가 만든 종이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그는 ‘30년 전에도 종이 산업은 사양 산업이었었다’면서 종이 산업이 줄어는 들어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석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2년 종잇밥 공장장 ‘종이, 용도는 달라져도 사라지지 않아’
    정보전달서 패키징용으로… 사라지는 수요만큼 추가 수요 생겨
    ‘영수증 항상 받아요’… 딱보면 우리 회사 것인지 알아요
    영화처럼 종잇밥 자부심 질문에… “말로 표현 못하는 애착”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박찬욱 감독이 지난해 말 선보인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종이 공장을 배경으로 한다.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 말하는 주인공(이병헌)은 어느날 해고 통지를 받는다. 모든 것을 잃을 위기였다. 이병헌 분은 그러나 다시 제지공장 취직을 노린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인물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것이 영화의 주 스토리다. 우여곡절 끝에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입사에 성공한 이병헌 분은 종이 공장의 공장장이 된다. 사람이 모두 사라진 공장에서 기계만 홀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압도적이다.

    ■“종이산업? 30년 전에도 사양산업이랬어요”

    한솔제지 천안공장에서 32년을 보낸 정경표 공장장은 이 영화를 봤느냐는 질문에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웃었다. 1995년에 입사한 정 공장장은 “제가 처음 입사를 했던 30여년 전에도 종이산업은 사양산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종이는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며 “예전에는 종이가 정보 전달 수단이었는데, 이제는 패키징 쪽으로 많이 바뀌었죠. 앞으로 IT화되면 또 다른 용도가 생겨날 겁니다. 기능성을 부여하는 종이도 나오고 있고, 칩도 종이로 만든다는 얘기도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인터뷰에 함께 배석했던 천안공장 관계자 세분에게도 ‘어쩔 수가 없다’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모두 봤다고 답했다. 제지 산업을 다룬 영화고 ‘올드보이’, ‘아가씨’, ‘친절한 금자씨’ 등으로 이미 거장 반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의 영화였기에 제지사 관계자들 역시 모두 관심이 컸다고 했다.

    정 공장장이 ‘종이의 미래는 있다’고 단언한 것은 단순한 낙관은 아니었다. 정 공장장은 “인류가 물건을 포장하고, 배달하고, 선물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한 종이는 살아있을 거에요. 또 물류가 있는 이상 포장을 해야 돼요. 그러려면 종이가 필요합니다. 형태가 바뀌고 용도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고 했다.

    다만 정 공장장은 전체 수요가 완만하게 줄어드는 것은 인정했다. 다만 그 감소의 속도가 예상보다는 훨씬 느리고, 수요가 줄어든 빈자리가 새로운 종이의 용도들이 발명되면서 감소분을 채워가고 있다는 점이 정 공장장의 시각이었다. 영화처럼 공장이 완전히 텅 비는 날이 오더라도, 그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정 공장장은 “나중에 진짜 어느 시점에 종이가 아예 없어질까 싶지는 않아요. 약간 줄어들고 있는 시장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고 말했다.

    헤럴드경제

    한솔제지 천안공장 [홍석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딱 보면 안다… 종잇밥 30년이면 종이의 지문을 읽는다

    정 공장장에게는 독특한 직업병이 하나 있다. 식당에서, 편의점에서, 카드를 긁고 영수증을 받으면 반드시 한 번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정 공장장은 “영수증을 항상 받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사람들은 종이를 꼭 받아서 봐요. 그리고 딱 보면 우리 제품인지 아닌지 알 수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정 공장장은 발색되는 색상, 검정색 안의 미묘한 블루나 레드 기운, 빛에 비쳤을 때 나타나는 섬유 패턴. 종이를 30년 넘게 만든 사람의 눈에는 회사마다 고유한 지압(紙壓) 패턴이 보인다고 했다.

    정 공장장은 “좁쌀 무늬 지압이냐 구름 모양 지압이냐, 취합 수치가 40단위냐 80단위냐, 이런 걸 보고 판단해요. 섬유가 분포된 패턴을 육안으로 읽는 거죠”라고 했다. 정 공장장은 “설화수 화장품 박스를 보면 우리 제품이구나 싶어 자부심이 생긴다”고도 했다.

    공장 구성원들은 정 공장장을 ‘부드러운 소통의 리더십’이라고 묘사했다. 역대 공장장들이 대체로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이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정 공장장은 ‘직원들에게 화를 낸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굳이 화내면서 갈 필요가 없어요. 못 따라온다 싶으면 코칭하면 돼요. 화낼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항상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고 했다.

    정 공장장이 항상 온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 공장장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로 “한번 물면 절대 안 놓는다”고 표현했다. 배석했던 천안공장 관계자들도 “공장장님은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있되, 그 방식이 억압이 아닌 소통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 공장장이 공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 6시다. 공식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 이르다. 집이 천안이라 차로 20분 거리지만, 그 이른 시각 출근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정 공장장은 “아침의 그 한시간이 저한테는 꿀 같은 시간이에요. 혼자 이 생각 저 생각 다 할 수 있고, 필요한 거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정 공장장의 이른 출근은 신입사원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라고 했다. 정 공장장은“6시 반이 넘으면 지각하는 느낌이 든다” 말하며 웃었다.

    ■100여 가지 특수지, 국내에서 천안공장만

    정 공장장이 이끄는 한솔제지 천안공장의 경쟁력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가 만드는 걸 한 공장에서 다 하는 곳은 국내에 없다” 현재 천안공장에서 생산 중인 특수지 지종은 100여 가지가 넘는다. 팬시지, 감열지, 글라신지, 전사지, 고급 인쇄용지에서 친환경 포장재까지. 자재 구분자로 따지면 1700여 개 품목이 이 공장 6개 설비 위를 순환한다.

    정 공장장은 “경쟁사들은 팬시지만 하는 공장, 기능지만 하는 공장, 감열지만 하는 공장 식으로 분리돼 있다”며 “우리는 특수지 대부분을 한 곳에서 생산한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강점에는 대가가 따른다. 지종 교체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이뤄지는 이 공장의 현장 부하는 다른 대형 공장에 비해 훨씬 높다. 정 공장장은 “비행기로 비유하면 다른 공장은 서울에서 미국 가는 거예요. 한 번 이륙하면 한참 갑니다. 저희는 서울에서 제주도 갔다가, 또 부산 갔다가, 다시 제주 갔다가 하는 식이에요. 이착륙을 계속 반복하는 거죠”라고 설명했다.

    종이를 만드는 순서도 정해져 있다. 처음엔 흰색에서 시작해 점점 진한 색으로 사이클을 돌리다가 마지막엔 검정종이까지 만든다. 이후 다시 흰색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기계를 세우고 청소를 한다. 대규모 장치산업인 제지 공장은 기계를 멈춰 세운만큼 그대로 비용이 된다. 그래서 청소 시간에 맞춰 모든 장치 점검도 새롭게 한다. 자주 고장나는 부분은 전장(전기장치)부분인데, 최대 수시간까지 전장 부문 오류로 멈췄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헤럴드경제

    명품 프라다에 사용되는 종이 포장재도 한솔제지가 공급했다. [홍석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 공장장 “균일성이 최고의 경쟁력”

    천안공장의 품질 경쟁력을 물었을 때 정 공장장이 꺼낸 단어는 평활도도, 강도도, 백색도도 아니었다. 정 공장장은 “균일성”이라고 답했다. 어떤 품질이라도 균일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종이는 강도, 표면 물성, 색상, 인쇄 적성 등 중요한 품질 기준이 수없이 많지만, 그 어떤 기준도 일관되게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천안공장이 대형 스마트폰 제조사 패키징 종이의 공급사로 자리 잡고, K뷰티 브랜드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균일성 때문이라고 정 공장장은 설명했다.

    인터뷰 말미 정 공장장에게 종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냐고 물었다. 정 공장장은 “종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사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디 가더라도 항상 보이는 게 종이에요. 영수증이든 화장품 박스든 책이든. 이게 어떤 종이일까, 우리 거일까, 항상 뜯어보게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종잇밥 30년 먹은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말로 표현 못하는 어떤 애착 그게 자부심입니다. 어쩔 수가 없는 거에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엔 기계만 남은 제지공장의 미래가 나온다. 하지만 천안공장에서는 아직 사람의 목소리가 더 컸다. 종이는 줄어드는가.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게 답하지 않았다. 사라지는 대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정경표 공장장이 말하는 “형태만 바뀔 뿐”이라는 문장은 2026년 제지업의 오늘을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말로 해석됐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