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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6 (월)

    <김삼기의 시사펀치> 3·15 의거 66년, 부정선거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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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시사

                            김삼기 시인·칼럼니스트·시사평론가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5일, 창원 국립3·15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6주년 3·15 의거 기념식에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부정선거가 발단이 된 3·15 의거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2010년 국가기념일 지정 이후 처음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행사 참석 이상의 질문을 남겼다. 왜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도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질문도 떠오른다. 최근 몇 년 동안 부정선거를 가장 크게 말해 왔던 윤석열정부 정치인은 왜 이 현장에서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부정선거 논쟁이 뜨거웠던 정치 현실을 떠올리면 더욱 묘한 장면이다.

    최근 한국 정치에서 ‘부정선거’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게 등장해 왔다. 선거 결과 자체를 의심하는 주장까지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선거관리위원회를 둘러싼 정치 공방도 이어졌다. 정치권과 온라인 공간에서는 선거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이 반복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당시 계엄군을 선관위에 보내 의심되는 자료를 확보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3·15 의거 기념식 참석은 상징성이 크다. 3·15 의거는 바로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 항거에서 시작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선거가 무너졌을 때 시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준 역사다. 그래서 3·15 의거는 단순한 지역 시위를 넘어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첫 시민 저항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필자는 한 가지 상상도 해봤다. 만약 12·3 비상계엄이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선관위의 구조적 문제나 부정이 실제로 확인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경우 윤 전 대통령이 3·15 의거 기념식 현장에 누구보다 먼저 모습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에 맞선 시민 항거의 역사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인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3·15 의거는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시작됐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 국가 권력을 총동원했다. 선거는 민주주의 절차라기보다 권력 유지 수단으로 변질됐다.

    시민의 의사는 선거 과정에서 철저히 왜곡됐다.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동원된 부정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유권자의 상당수를 미리 투표한 것처럼 꾸미는 사전투표 조작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서로의 기표를 확인하게 하는 공개투표도 있었다.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방식도 동원됐다.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가 완전히 무너진 사건이었다.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선거 당일 밤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백명 규모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1만명이 넘는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요구는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기본 규칙을 지키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정권의 대응은 대화가 아니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마산 거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명이 부상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유혈 민주화운동이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에게 국가 권력이 총을 겨눈 사건이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약 한 달 뒤 충격적인 장면이 나타났다. 실종됐던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의 눈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 장면은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 사진이 전국 언론을 통해 퍼지면서 마산의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결국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에서도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정권에 대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것이 바로 1960년 4·19 혁명이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무너졌다.

    많은 사람들은 4·19 혁명을 기억하지만, 그 혁명의 불씨는 3·15 의거였다. 마산에서 시작된 시민 항거가 전국적 민주화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3·15 의거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첫 시민 저항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이 운동의 중심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부정선거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 침묵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작됐다.

    3·15 의거의 핵심 정신은 분명하다.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 저항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시민이 투표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역사다.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선이 바로 여기다. 이런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대통령이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장면이다.

    3·15 의거는 부정선거라는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기념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다. 선거의 공정성과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상징이기도 하다.

    어쩌면 역대 대통령들은 이 상징성을 부담스럽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선거 논쟁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은 4·19 혁명 기념식에는 참석했지만 3·15 의거 기념식에는 가지 않았다. 4·19는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상징이 강하다. 그러나 3·15는 부정선거라는 직접적인 정치 문제와 연결된다. 정치적으로 훨씬 예민한 사건이다. 그래서 정치권은 늘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여왔다. 이런 점에서 이번 이 대통령의 참석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필자는 부정선거 문제를 가장 강하게 주장했던 윤정부와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왜 이 행사에서 보이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만약 부정선거를 가장 크게 문제 삼았다면 오히려 부정선거 항거의 상징적인 역사 현장에서 더 강한 메시지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들은 역사 현장 앞에 서지 않았을까. 역사는 때때로 정치보다 정직하다. 1960년 마산의 학생들은 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투표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래서 3·15 의거는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며 부정선거에 맞서 싸운 시민의 역사다.

    3·15 의거의 질문은 지금도 살아 있다. 선거는 정말 공정한가.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부정선거를 말하는 정치인들은 왜 그 역사 앞에 서지 않았는가.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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