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복잡해 ‘어려운 음악’ 인식
연주 역량·청중 수준 발전 맞물려
정제되지 않은 감정과 경험 선사
이젠 대중적 레퍼토리로 자리잡아
요즘 국내 공연장에서 말러는 자주 연주된다. 너무 자주라서 이제는 특별히 화제가 되지 않을 정도다.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인 서울시향은 올해 말러 교향곡 4번과 6번을 연주하고, KBS교향악단은 교향곡 4번, 5번, 6번을 연주한다. 이처럼 한 시즌에 여러 악단이 말러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제 말러는 더 이상 야심작이 아니라 당연히 자리 잡고 있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의 프로그램을 보면 말러의 교향곡은 우리가 흔히 아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보다도 더 자주 연주되고, 심지어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보다도 더 많이 무대에 오른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
이쯤 되면 상황은 역전된다. 한때 말러는 클래식 애호가들만이 즐겨 듣는 어려운 음악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의 공연장에서는 오히려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되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모르면 공연 프로그램을 따라가기 어렵듯이, 이제는 말러를 모르는 편이 오히려 손해다. 한 시즌 동안 여러 악단이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고 다른 지휘자의 해석이 이어서 무대에 오른다. 말러는 더 이상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기본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현상을 단순히 말러 열풍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단계를 지났다. 열풍은 지나갔고 오히려 일상에 가깝다. 한때 말러는 대편성과 긴 연주 시간, 복잡한 구조 때문에 연주하고 싶어도 쉽게 할 수 없는 음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의 국내 오케스트라들은 말러를 연주할 수 있는 조건을 대부분 갖추게 되었다. 말러 레퍼토리를 충분히 경험한 지휘자들과 단원들, 장기 리허설을 감당할 수 있는 제작 구조, 대규모 편성을 안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무대와 음향 환경, 그리고 복잡한 말러의 음악 언어를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청중까지 형성되었다.
한때 말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의 잘난 척처럼 들리기도 했다. 말러의 교향곡은 길고 복잡하고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러를 즐겨 듣는다고 하면 클래식을 꽤 오래 들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말러는 더 이상 일부 애호가들만의 음악이 아니다. 공연장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청중 역시 그 긴 시간을 특별한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짧고 즉각적인 자극이 일상이 된 시대에 왜 이렇게 길고 복잡한 말러가 계속 선택되는 걸까. 말러가 쇼트폼이 제공하지 못하는 종류의 시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말러의 교향곡은 몇 분 안에 소비되지 않는다. 중간을 잘라내면 남는 것은 장면의 조각뿐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야만 하나의 흐름이 생긴다. 반복 속에서 감정이 쌓이고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전체가 보인다. 쇼트폼에 익숙한 청중에게 말러는 편한 음악은 아니지만 대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경험을 남긴다. 긴 음악임에도 사람들이 다시 말러를 선택하는 이유도 결국 이 경험 때문이다.
말러의 음악 안에는 슬픔, 불안, 분노, 아이러니, 희망 같은 감정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공존한다. 청중은 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의 삶을 음악에 대입할 수 있다. 오늘의 청중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점이다. 그의 음악은 우리의 삶을 대신 설명해 주는 음악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감정들을 음악 속에서 다시 확인하게 하는 음악이 되었다. 그래서 더 자주 연주되고 반복해서 연주된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러는 자신의 시대를 기다렸다. 한때는 너무 이르다고, 또 한동안은 너무 무겁다고 외면받았던 음악이 이제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도 받아들여진다. 말러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