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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0 (금)

    [기자가만난세상] AI가 꿰뚫어본 장애인 복지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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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구청장실 앞에 아들과 함께 드러누우세요.”

    시한부인 전경철씨가 최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의 거주시설을 구할 방법을 묻자 인공지능(AI)으로부터 받은 답변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AI의 기술적 한계나 오류라고만 생각했다. 세계 경제 9위, 선진국 타이틀까지 단 대한민국에서 시민의 생존권이 고작 구청장실 앞바닥에 누워야만 보장될 리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 때문이다.

    세계일보

    채명준 사회부 기자


    현실은 상식을 처참히 비껴갔다.

    전씨 사연이 보도되고 서울시까지 나서 시설을 물색하겠다고 공언한 지 3주가 지났지만, 간암 말기로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전씨는 여전히 홀로 아들을 씻기고 끼니를 챙기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 부끄럽게도 대한민국 복지의 민낯을 AI가 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셈이다. AI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발달장애인의 권리는 법전 속 조항이 아니라 차가운 바닥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을 때만 ‘시혜’처럼 주어진다는 비정한 사실을 말이다.

    과거에도 우리 곁에는 수많은 ‘전씨’들이 있었다. “제발 특수 학교 좀 지어 달라”며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 직장을 그만두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대소변을 받아내며 발달장애 자녀를 돌보는 아버지들.

    ‘목소리 크면 갑’이라는 룰이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이들은 항상 ‘을’이다. 생업과 돌봄을 병행하느라 길에서 목소리 낼 시간조차 없어서다. 그렇게 홀로 허우적대던 그들은 결국 벼랑 끝에 내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 복지 예산은 지난 10년간 4배 이상 늘었지만 발달장애인 가정의 고통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과거보다 시설 입소가 더 어려워졌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 중심에는 준비 없는 ‘탈시설’ 정책이 자리한다. 정부가 발달장애인 수요에 맞춰 거주시설을 확충하는 과정은 건너뛴 채 비용 대비 수혜자가 적은 탈시설에 집중하며 정작 당장 갈 곳 없는 발달장애인 가정들을 궁지로 몰기 때문이다.

    탈시설의 취지는 훌륭하고 앞으로 장애인 복지가 나아갈 방향이 맞다. 다만 정책은 예산과 우선순위를 고려해 정밀하게 추진돼야 한다.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장애인 복지 지출 비중은 약 0.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2.1%)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처럼 기초가 부실한 복지 정책은 결국 발달장애인 가정의 희생을 거름 삼아 버티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는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제 국가는 이 준엄한 약속에 답해야 한다. 전씨가 아들이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지내는 모습만은 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만약 우리가 끝내 전씨를 외면한다면 훗날 또 다른 아버지가 AI에게 해결책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AI는 변함없이 구청장실 앞에 자녀와 함께 드러누우라고 답할 거다. 이미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 차가운 기계의 답변이 ‘할루시네이션’(환각)이었음을 사회가 증명해야만 한다.

    채명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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