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인천세종병원 심장이식센터장
[김경희 인천세종병원 심장이식센터장] 중증 심부전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약물이나 시술로는 환자의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환자와 함께 또 하나의 선택을 마주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선택은 결국 심장이식이나 좌심실 보조장치 같은 인공심장으로 이어진다.
이번 환자는 60대 남성이었고, 이미 타 병원에서 심한 심부전으로 제세동기를 삽입 받은 상태에서 더 이상의 치료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이식을 고려하며 의뢰된 분이었다. 처음 진료실에서 마주했을 때 좌심실 기능은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고, 단순한 만성 심부전의 자연 경과라기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의심하게 만드는 양상이었다.
병력을 다시 확인해보니 환자는 40대에 파브리병(Fabry disease)을 진단받았고, 이후 약 10여 년 동안 효소 보충 치료를 꾸준히 받아온 상태였다. 파브리병은 알파-갈락토시다아제 A 결핍으로 인해 당지질이 체내에 축적되는 X-연관 유전질환으로, 초기에는 비교적 경미한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심장, 신장, 신경계를 침범하게 된다. 이 환자 역시 장기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심근벽의 비후가 오히려 얇아지면서 점진적인 심기능 저하가 진행되었고, 결국 약물 치료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식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과정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의학적으로는 비교적 명확한 판단에 도달했더라도 환자에게 이식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환자와 보호자는 입원을 잠시 미루었고, 그 시간 동안 가족들과 충분한 논의를 거쳤던 것으로 보였다. 이후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지만 그 표정에는 여전히 불안과 망설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입원 후 이식 대기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장 강조하게 되는 부분은 이 치료가 우리가 계획할 수 있는 영역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식은 기증자의 발생이라는 외부 조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수주 내에 수술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몇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환자에게 단순한 신체적 부담을 넘어서는 심리적 무게로 작용한다. 기다리는 동안 상태가 악화되거나 이식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 수술 이후의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한 부담이 겹쳐지면서 환자는 점점 지쳐간다. 실제로 일부 환자들은 강심제 치료를 유지한 채 수개월을 버티며 대기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기증자 수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전반적으로 이식 대기 기간이 이전보다 더 길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임상에서 분명히 체감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할 때마다 “언제 수술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따라오지만,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끝내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리고 그 답할 수 없음 자체가 환자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환자의 상태보다 먼저 변하는 것은 마음이다. 처음에는 비교적 담담하게 검사 과정을 받아들이던 환자였지만, 모든 검사가 끝나고 나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게 되자, 기다림이 그대로 환자의 몫으로 남게 되었고 그 무게는 생각보다 빠르게 환자를 짓눌렀다.
체중이 줄고 기력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불안과 초조함이 점점 더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저하된 심기능은 전신 장기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신기능과 간기능 역시 서서히 악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환자는 단순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더 불리한 상태로 밀려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환자 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는 사람들은 코디네이터들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병실을 오가며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듣고, 때로는 답을 알면서도 말해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 질문을 다시 받아내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보호자가 곁에 없는 환자에게는 코디네이터가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기도 하고, 환자의 하루는 그 짧은 만남들을 중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환자가 하루에 한 번씩 코디네이터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시간이 어떤 의미였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은 환자가 버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환자가 “언제쯤 수술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말해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것이 코디네이터들의 중요한 역할이고, 이식이라는 과정이 팀으로 이루어지는 치료라는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느 날 회진 중 환자를 보면서 오래 기다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특정 수치나 검사 결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랜 시간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환자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뇌사자 발생의 추이에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조심스럽게 “명절 전에는 가능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날 밤 여러 기관에서 뇌사자 공지가 올라왔고, 우리의 우선순위는 높지 않았지만 여러 조건들이 맞물리면서 결국 기회가 오게 되었다. 이식이라는 치료는 언제나 준비된 시스템 위에 우연과 타이밍이 겹쳐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기증자 병원은 비교적 가까웠고, 적출팀의 이동과 심장의 이송도 지연 없이 이루어졌다. 기증자의 심장은 매우 양호했고, 심초음파로 확인했던 것보다 더 좋은 상태였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그 사실을 설명했을 때, 보호자는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긴 기다림과 불안,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한 안도감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수술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고, 이식 후 초기 회복 과정 역시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비교적 빠르게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반응을 확인하는 순간은 늘 긴장되지만 그날은 비교적 안도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환자가 의식을 회복한 직후 가장 먼저 한 말은 의외로 단순했다. 복숭아를 가져와 달라는 말이었다. 환자는 지방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 분이었다. 외래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복숭아를 가져온 적이 있었고, 그 복숭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표정이 유난히 밝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분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는데, 이식 이후에도 그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파브리병 환자에서 심장이식은 질환 자체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장 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도달한 경우 생존과 삶의 질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이 환자 역시 오랜 시간 질환과 함께 살아오다가 결국 이식을 통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퇴원을 앞두고 병실을 방문했을 때, 한쪽에 놓여 있던 복숭아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병실 안에는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 퍼져 있었고, 그 향은 단순한 과일의 냄새를 넘어 환자가 다시 삶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심부전을 치료한다는 것은 결국 환자의 시간을 조금 더 이어주는 일이고, 심장이식은 그 멈춰가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치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결과이다.
그날 병실에 남아 있던 복숭아 향은, 그 사실을 조용히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다.
◇ 파브리병(Fabry‘s disease)과 심장 침범
이번 사례의 환자가 앓고 있던 질환은 파브리병이다. 파브리병은 X-염색체와 관련된 유전성 희귀질환으로 세포 내에서 특정 물질을 분해하는 효소(알파-갈락토시다아제 A)가 부족하여 당지질이 체내에 축적되는 질환이다. 이 물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장, 신장, 신경계 등 여러 장기에 서서히 쌓이면서 기능 저하를 유발한다.
초기에는 비교적 경미한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점차 장기 손상이 뚜렷해지고, 특히 심장에서는 비후성 심근병증, 부정맥, 판막 질환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신장 역시 영향을 받아 만성 신질환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 환자 또한 심근병증과 심방세동으로 기기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신기능 저하도 함께 진행된 상태였다. 파브리병은 조기 진단이 중요하며, 현재는 부족한 효소를 보충하는 효소 대체 요법을 통해 질환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장기의 구조적 변화가 진행된 경우에는 회복이 어렵고, 심장 기능이 말기에 도달하면 결국 이식이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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