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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3 (월)

    [특파원리포트] 트럼프의 ‘진주만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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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엔 아픈 기억·日엔 침략의 상징

    다카이치와 회담 중 돌발적 발언

    이란 공습·진주만 공격 비유 안 돼

    동맹국에 참전 요구 옳은 일인가

    그때도 석유가 주요한 이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중립 노선을 유지했다. 대신 연합국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유럽 전선에 발이 묶인 사이 그들의 동남아 식민지를 침략하던 일본에는 전면적인 석유 수출 금지로 대응했다. 석유 수입의 80%를 미국에 의존하던 일본은 경제·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했으나 잘 풀리지 않자 기습 공격을 택했다. 1941년 12월7일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함대에 폭탄을 퍼부은 것이다. 일본은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공습 30분 전 선전포고를 하기로 계획했다. 주미 일본대사관의 문서 작성이 늦어지면서 폭격이 이미 시작되고 약 1시간이 지나서야 전달됐다.

    세계일보

    유태영 도쿄 특파원


    일본의 기습으로 미국 전함 21척과 전투기 188대가 파괴됐고 2000명 이상 사망했다. 다음 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을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서프라이즈(surprise·깜짝 놀랄 일)를 원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서프라이즈에 대해 일본보다 더 잘 아는 곳이 어디 있겠냐. 진주만에 대해 왜 미리 말하지 않았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9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르무즈해협 군함 파견을 요청하며 일본 등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는 트럼프에게 ‘왜 동맹에게 이란 공격에 대해 사전 언질도 안 줬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하자 돌아온 답이었다. 질책성으로 들릴 법한 질문에 트럼프는 농담으로 응수했고 둘째 아들 에릭 트럼프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역사상 최고의 반박이었다”고 추켜세웠지만, 여러모로 부적절했다.

    일단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국과 일본은 동맹 관계가 아니었다. 지금은 태평양 지역의 핵심 동맹이다. 뉴욕타임스 지적대로 그간 미국 대통령들은 진주만 공습에 대해 가혹하게 말하는 것을 피했고, 대신 일본과의 관계 강화에 초점을 맞춰왔다. 2016년 양국 정상이 진주만을 찾아 화해와 애도의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TV 화면으로 송출된 트럼프의 진주만 농담을 보면서, 전 세계가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인식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것이다. 동맹에 관세 폭탄, 군사비 증액 폭탄, 말 폭탄을 던지면서 이제는 전쟁에까지 휘말리도록 요구하는 미국 대통령은 과연 신뢰할 만한 상대인가.

    그러고 보면 트럼프는 지난해에는 이란 지하 핵시설을 공습한 뒤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전쟁을 끝낸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공격이었다.”

    이란에 대한 군사작전을 진주만 공습과 동일 선상에 놓은 점도 의문스럽다. 진주만 공습은 무모하고 비열한 기습이 아니라 효과적인 군사작전이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란과의 핵 협상 도중 공습을 가한 미국은 85년 전 일본만큼 비열했던 것일까.

    더욱이 진주만의 결과는 협상의 시작, 전쟁의 끝이 아니라 더 큰 수렁의 출발점이었다. 이란과의 장기전·지상전 가능성과 세계 석유 공급망의 충격파를 걱정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적절한 비유로 보기 어렵다.

    트럼프의 농담을 접하고 나니 이란 전쟁 자체를 돌아보게 된다. 이란 지도부 핵심 인사들 제거는 협상할 상대의 부재를 의미한다. 독재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순교자 반열에 올랐고, 이란 내부의 변화 동력은 미국·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에 묻혔다. 미국이 힘의 논리를 앞세운 탓에 러시아, 중국 등의 ‘힘에 의한 현상 변경’ 시도를 비난할 근거도 약해졌다. 주한·주일 미군 자산이 중동으로 이동하면서 북한 위협 대응력 약화 우려도 커졌다. 무엇보다도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권력자들에게 핵에 더욱 집착하도록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미·중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으로 서둘러 방미 일정을 잡았다가 고약한 시기에 트럼프를 대면하게 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의 결과로 미 군정(GHQ)이 설계한 바로 그 ‘법적 제약’을 이유로 호르무즈해협 파병 압박을 피해갔다. 자신의 지론인 개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유태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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