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동계올림픽은 강원도의 이름 없는 산골이었던 이 지역을 단숨에 세계 지도의 정중앙으로 격상시켰다. CNN, BBC 등 전 세계 주요 외신은 연일 'PyeongChang'이라는 지명을 송출했고, 눈 덮인 평창의 풍경은 국가 브랜드와 결합되어 하나의 글로벌 아이콘으로 소비되었다. 당시 평창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었다. 인류의 축제가 머무는 물리적 중심이었고, 모든 자원과 시간이 압축된 밀도로 그곳에 쏟아졌다.
전혜연 대표. |
올림픽 기간 17일 동안 개최 지역을 찾은 방문객은 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중 외국인 방문객만 수십만 명에 달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이 기회를 영속시키기 위해 유례없는 물적 기반을 닦았다. 수조 원을 들여 서울과 강릉을 잇는 KTX 경강선을 개통했고, 양양국제공항과 평창을 잇는 동선은 세계를 향해 열린 '직통 통로'였다. 또한 올림픽 이후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수천억 원 규모의 올림픽 기념재단 기금이 조성되었다. 하드웨어와 자본, 그리고 세계적인 인지도라는 세 박자가 이보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적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올림픽 전후 평창 전역에서 일어났던 전위적인 문화적 실험들이다. 당시 평창은 단순한 스포츠 도시의 외피를 벗고 동시대적 예술의 장으로 확장될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는 지역의 투박한 삶이 깃든 유휴 공간들이 있었다. 투박한 외벽을 가진 감자창고는 첨단 미디어 아트가 투사되는 캔버스가 되었고, 지역의 산업 유산이었던 김치공장은 예술가들의 창의적 에너지가 결합한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흙 냄새 나는 지역의 물리적 구조가 뉴미디어라는 새로운 감각과 만나며, 평창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문화적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내던 순간이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경기장보다도, 지역의 서사를 품은 이 낡은 공간들이 보여준 가능성은 평창이 '글로벌 문화 허브'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단서였다. 공간이 가진 기억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예술적 상상력을 덧입혔던 이 실험들은, 평창이 세계에 던진 가장 신선한 질문이기도 했다.
김치창고를 활용한 미디어전시장 (평창올림픽당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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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화의 축적은 사건의 규모나 기금의 액수에 비례하지 않는다. 올림픽은 강력한 투광 등과 같아서 짧은 시간 모든 것을 밝히지만, 조명이 꺼진 뒤의 어둠을 채워줄 자생적 생태계까지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평창이 세계적 도시로 호명되던 그 골든 타임 동안, 정작 지역의 '문화적 기초 체력'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행정적 성과주의에 묻히고 말았다.
비극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막대한 올림픽 유산 기금과 인프라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장기적인 문화 구조로 설계할 전문 기획자나 국제적인 예술 네트워크와의 협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신 내부 행정 단위 안에서 예산을 단기적으로 소모하는 관행이 반복되었다. 이는 한국 공공 문화 정책의 고질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문화를 전문적인 설계와 지속적 실행의 영역이 아닌, 단순한 '행사 운영'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때 축적의 시간은 증발한다.
그 결과는 뼈아프다. 올림픽 당시 수백만 명에 달하던 방문객 수치는 이제 기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올림픽 특수를 타고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갔던 이동의 리듬은 급격히 약해졌다. 공항과 평창을 직접 연결하던 KTX 노선과 교통편은 실효성을 잃고 점차 축소되었으며, 한때 집중되었던 국제적 시선은 차갑게 식어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접근성을 상징하던 물리적 통로들이 하나 둘 기능을 잃어가며, 평창은 다시 고립된 지역적 시간 속으로 회귀했다.
이는 단순한 '인기 하락'이 아니라 구조적 설계의 실패다. 국제적 사건으로 밀도화 된 도시의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건 이후 공간을 점유할 주체와 프로그램, 즉 '소프트웨어적 장치'가 필수적이다. 예술가가 상주하고, 지역 주민이 관계를 맺으며, 외부 크리에이터들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네트워크가 부재할 때, 도시는 한 번의 정점을 경험한 뒤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주변부로 밀려난다.
무이예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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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정적 시계가 멈춘 곳에서, 지역의 유산을 지키려는 민간의 숨은 노력은 여전히 호흡하고 있다. 행정이 거대 담론을 쫓다 놓쳐버린 '사람 중심의 생태계'를 묵묵히 일궈내는 이들은 다름 아닌 민간 기획자와 예술가들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멈췄던 폐교를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재탄생시킨 '무이예술관'와 같은 사례는 평창의 자생적 저력을 상징한다.
이들은 막대한 기금에 의존하기보다, 지역 주민과 예술가가 수평적으로 만나는 접점을 만들고 지역의 고유한 리듬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번역해낸다. 대형 프로젝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것은 결국 이러한 '작은 점유'의 힘이다. 행정의 속도가 아닌 삶의 속도로 공간을 다시 채우고, 잊혀가는 장소의 기억을 기록하며, 외부와 내부를 잇는 네트워크를 자발적으로 구축하는 민간의 움직임 이야말로 소모된 시간 속에서도 유일하게 퇴적되고 있는 진짜 문화적 자산이다.
평창이 보여주는 사례는 국제적 기회가 얼마나 허망하게 소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준엄한 기록이다. 순간의 성공을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전환하지 못할 때, 도시는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과 초라한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 갇힌다. 평창의 현재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그 압축된 기회의 시간 동안 무엇을 남겼는가.
그러나 소모된 시간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한 번 밀도화된 경험은 장소의 잠재적 기억으로 남는다. 감자창고와 김치공장이 전시장으로 변모했던 순간, 폐교가 문화적 허브로 작동했던 실험은 여전히 다른 가능성의 형태로 남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거대 이벤트를 유치하는 요행이 아니다. 비어 있는 공간을 다시 점유하고, 지역의 서사를 동시대 감각으로 번역하며, 내부의 리듬을 지속시키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삼양목장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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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이벤트를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벤트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그곳에서 계속 사용하고 쌓아 올린 '시간의 두께'만을 기억할 뿐이다. 평창의 시간은 멈춘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행정의 속도가 아닌 문화의 리듬으로 다시 쓰여야 할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국제적 기회는 다시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의 시간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평창이 보여주는 것은 기회를 놓친 도시의 서사가 아니라, 축적되지 못한 시간을 어떻게 다시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엄중한 과제이다.
*전혜연은 여성인권·미디어아트·도시교류를 통해 예술을 사회변화의 도구로 만드는 행동하는 큐레이터다. 2014년 글렌데일 '위안부의 날 특별전'을 시작으로 소녀상 지키기 국제 연대전을 이끌었고, 2017년부터 글렌데일시 공식 행사로 승격, 8개국 100여 명 작가가 참여했다. 국내에선 《여성인권이야기: 행진》을 성북, 부산, 보은, 고성, 포항, 인천, 김포, 파주 등 지방정부와 함께 이어가고 있다. 2018 평창올림픽 미디어아트 기획을 계기로 공공 미디어아트의 사회적 소통 가능성을 열었고, 수원문화축전·국립극장 등에서 지역 역사와 장소성을 담은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김포-글렌데일 교류전은 '경계'와 '자유'를 주제로 일상 공간에 공공미술을 설치했으며, 2024년에는 김포의 지역 의제를 다룬 '다양성'이란 전시로 네 지역을 아우르는 28명 작가 참여한 대규모 미디어아트전도 기획했다. 최근에는 사이버불링을 여성인권 의제로 삼아 국회 논의·전시·온라인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그는 예술이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 대안과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현 국제예술생태연구협회 대표, 귀주사범대 동아시아미디어센터 책임연구원, 비영리 단체 문화유목민 대표, 전시 기획사 SR Comm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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