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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제 '어디로'가 아닌 '어떻게'"…'여가의 기술'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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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관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갈 수 있도록 타자기를 비치한 전보경 작가의 설치공간.


타인과 자신을 기록하다, 느릿하게
옛 서울역 리모델링...'여가의 기술-언젠가 느긋하게' 전시회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서울역 우연히 들러서 글 남기고 갑니다.…안타깝다. 한명이라도 생존자가 한시라도 빨리 나와야 할텐데...", "저는 혼자에요. 나쁘지 않지만 조금 외롭네요. 오늘 많이 심란하네요.", "우리 힘을 내요."

전시장으로 바뀐 구(舊)서울역 2층에는 최근 관람객이 타자기를 두드려 남기고간 글귀들이 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걱정이 '세월호'에 쏠려있는 만큼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자기가 설치된 곳에서 방문객들이 직접 타이핑을 하면 이 내용들은 전시가 끝난 후 책으로 담겨진다. 이곳 설치 작품 '도래할 책'을 꾸린 전보경 작가는 "요즘 사람들이 타자기를 다루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뻑뻑하고 느린 타자기를 치면서 좀 더 생각할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장치"라며 "많은 사람들이 '외롭다'는 이야기를 적고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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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관, 미디어 설치작품 '글자의 휴식'.


옛 역사를 리모델링한 전시장 내부에는 '책과 독서' 외에도 '정원 만들기', '휴식', '산책', '여행' 등 여가선용의 다양한 테마를 지닌 작품들과 공간연출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달 말부터 열리는 중인 이 전시의 제목은 '여가의 기술-언젠간 느긋하게'. 지친 현대인의 삶을 치유하려는 듯한 전시장 분위기는 지난주부터 숙연한 느낌이 더해지고 있다.

김노암 예술감독은 "'여가'에 대한 재해석과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유도하기 위해 편안하면서도 차분하게 전시를 구성했다"며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번 전시가 이웃의 고통을 보듬고 생각하는 시각을 갖는데도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같은 층 전시장에는 '책 제목'을 엮어 창작 시(時)로 만든 오재우 작가의 작품도 눈에 띈다. 쌓여있는 책 제목을 위에서 아래로 읽다보면 한편의 시가 된다. "너, 외롭구나/그 말 한마디/그때는 몰랐습니다/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사랑받지 못하여/너무도 쓸쓸한 당신/여기 아닌 어딘가에/행복을 찾아서/너도 한번 사랑을 해봐/안 된다고 하지 말고 아니라고 하지 말고/간절히 원하고 뜨겁게 행동하라/아직 네 차례가 오지 않았을 뿐/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삭막한 우리들의 마음을 살포시 어루만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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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으로 창작 시를 짓는 오재우 작가의 설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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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입(Kayip, 이우준), 자연의 파노라마 영상과 사운드 작품.


또한 북칼럼니스트 박사씨가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매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노트 28권도 살펴볼 수 있다. 박씨는 "여행이란 걸 꼭 멀리 어디론가 나가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을 여행한단 기분으로 한 달에 한권씩 써 내려갔다"며 "거의 여가보다는 노동에 가깝지만, 생산성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가가 맞는 것 같다. 사람들이 노트를 보고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한다"고 말했다.

전시 부대행사인 여행인문학 콘서트에 강사로 참여중인 평화활동가 임영신씨는 "이제 여행은 '어디로'가 아닌 '어떻게'의 시대로 도래했다"며 "여행은 다른 시간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자 다른 시선으로 다른 세상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 분쟁지역에서 평화활동을 했으며, 여행자와 여행자를 맞이하는 사람 모두가 행복한 여행을 구상하며 '공정여행'을 주창해 왔다.

전시장에는 빈백(bean bag)소파가 놓여 휴식을 취하기에 알맞은 널찍한 설치 공간도 여럿 있다. 푹신한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해 천장을 바라보면 수없이 많은 한글이 몽환적고 아름답게 움직인다. 노승관 작가의 '글자의 휴식'이란 작품이다. 1층으로 내려가면 중앙홀을 가득 메운 600여개의 스피커가 산처럼 쌓인 설치작품을 통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또 베란다 정원, 옥상 텃밭은 물론 재활용 정원과 같은 일상적이고 심미적인 실재정원을 구현한 정원들이 있다. 세계적 작곡가 브라이언 이노가 극찬한 작곡가이자 사운드디자이너 카입(Kayip·이우준)이 63m 길이의 서측복도에 담아낸 광대한 자연의 파노라마 영상도 만나볼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바쁘게만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 최근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건은 집단적 우울증에 빠뜨리고 있다. 비단 대형재난사고 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사회는 늘 위험 속에 노출돼 있었다. 그동안 어떤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문제해결 보단 일단 덮고 살던 대로 살아가기에 급급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에 대해 제동을 걸고 진지한 고민을 과연 해봤나 싶다. 쫓기듯 정돈 없이 살아가며 '안전하지 못한' 일상 속에 스스로를, 또 서로가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5월 7일까지.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 문의 문화역서울 284 (02-3407-350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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