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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관시로 유명한 중의학계, 이 악물며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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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성 중의약학대 김형석 주임교수

경향신문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약재상을 하시던 형님 밑에서 허드렛일을 했죠. 당시 약재상들 가운데 중국에 가서 ‘의사 고시’를 보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 따라 중국에 갔다 중의학을 알게 된 거죠.”

중국 랴오닝성 중의약학대학에서 주임교수직을 맡고 있는 김형석 중의학 교수(46)는 같은 대학병원 재활센터 척추평형요법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김 교수는 이 대학 신장내과에서 석사 학위를, 심혈관내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인이 중국 전통의학인 중의학을 전공하고, 중국 대형 병원의 주임교수가 된 사례는 드물다.

최근 휴가차 한국에 들어온 김 교수를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만났다. 김 교수가 중의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약재상을 하는 친형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까지 마쳤지만 앞길이 막막하더라고요.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형님을 도우는 일부터 시작했죠.”

형을 도우면서도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약재상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약재상 일을 하면서 키운 꿈과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1993년 9월 중국에 갔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어요. 공부는 차치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한 곳이 ‘조선족(중국 동포)’이 많은 옌볜이었죠. 그곳에서 중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몇 년이 지나 자신감이 붙고 나서야 ‘진짜 중국’인 랴오닝성의 중의약학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말은 어느 정도 익혔지만, 중국 문화에 적응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엔 유명한 ‘관시(關係·관계)’라는 게 있잖아요. 중의학에선 안 그래도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분위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끈’도 없는 제가 살아남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만의 기술로 언젠가 환자를 고치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이 악물고 버텼어요.”

그는 ‘안(按), 침(鍼), 구(灸), 약(藥)’의 단계로 환자를 치료한다. 뼈의 불균형을 교정하고 침으로 경락을 다스린 후, 뜸을 통해 기운을 보충하고 필요한 약을 처방하는 순이다. 김 교수는 이 방법을 전통적 중의학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요즘 한의학과 중의학 모두 부인과, 내과 등으로 분업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병의 근원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지적인 증세는 약을 써서 일시적으로 나아질 수 있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재발하기 마련이죠. 그 때문에 인간의 몸을 전체적으로 보는 중국의 전통적 치료법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중의학을 20년 넘게 공부한 경험을 살려 환자를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이름이 알려지고 김 교수를 찾는 곳도 많아졌다고 한다. 김 교수는 “지금은 소속 대학 1000여명의 의사 중 맡은 환자 수가 가장 많다”면서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늘고 있어 외국인에게 다소 배타적인 중의사들에게도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훗날 자신의 경험을 살려 ‘노인’을 위한 전문 치료를 하겠다고 밝혔다.

“실버타운을 만들고 싶어요. 진료를 하면서 죽음을 불행하게 기다리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행복하게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글·사진 | 안광호 기자·정두용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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