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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라이프 트렌드] 책과 가을이 머무르는 곳으로 힐링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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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테이’를 찾는 사람들

조선 시대 세종은 선선한 가을이 되면 관리들에게 특별 휴가를 내렸다고 한다. 궁에서 떨어진 산속에서 휴식하면서 책에 집중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가 그것이다. 최근 사가독서 제도를 연상케 하는 ‘북스테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지친 나에게 스스로 독서 휴가를 주면서 힐링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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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북스테이 지지향을 찾은 여성들이 박범신 작가의 전집과 소장품으로 꾸며진 객실 앞 복도에서 책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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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 한수진(30·가명)씨는 금요일 휴가를 내고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북스테이를 홀로 찾았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럽게 떠나 보낸 지 5개월이 되어 간다”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마음을 추스르고 싶어 북스테이를 찾았다”고 말했다. 이곳에 올 때 그가 챙긴 물품은 좋은 글귀가 적힌 책 몇 권과 일기장이 전부. 그는 “가족·친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보고 자신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라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 김동진(65·가명)씨 부부는 강원도 속초에 있는 북스테이를 찾았다. 평소 독서를 좋아하는 부부는 도심을 떠나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싶었다. 김씨는 “책을 읽을 거면 집에서 읽지 왜 이런 곳에 올까 의아했는데, 동해가 보이는 방에서 책을 읽고 근처 호숫가를 산책하니 여행의 참맛이 느껴진다”며 “관광은 하지 않지만 지역 유명 식당엔 찾아간다”고 말했다. 김씨 부부는 전국 각지에 있는 북스테이를 방문해 책을 읽고 다양한 맛집도 찾아다닐 예정이라고 말했다.

책과 여행이 합쳐진 새로운 숙박 공간인 북스테이가 전국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TV나 게임 같은 오락시설은 없지만 적게는 수백 권, 많게는 몇만 권의 책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휴식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욕구에서 비롯됐다. 3~4년 전부터 인문학 강의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유튜브나 페이스북에서 책 읽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북튜버’와 독서모임이 인기를 끌더니 지난해부터는 북스테이가 새로운 독서 채널로 활성화되고 있다.

낯선 이들과 밤샘 독서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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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경기도 파주시 모티프원


숫자만 많아진 것이 아니다. 운영자의 개성과 감성에 따라 콘셉트도 가지각색이다. 전남 고흥군에는 2015년 여름에 문을 연 ‘가고파 그 집’이 있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을 지새울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란 생각으로 이곳을 열었다. 부가적으로 책을 출판하거나 판매하는 다른 북스테이와 달리 여행자의 독서에 집중한다. 투숙 3일 전까지 읽고 싶은 책을 알려주면 운영진이 책을 미리 준비해뒀다가 선물처럼 전달하고 숙박비도 할인해 준다. 최화준 가고파 그 집 대표는 “독서모임을 통해 책 취향이 각기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며 “여러 권의 책을 서재 형태로 제공하는 것도 좋지만 여행자가 원하는 책을 직접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경기도 파주시의 ‘모티프원’은 새벽까지 주인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이안수 모티프원 대표는 “여행잡지 기자를 하다 편집장이 됐는데, 편집장이 되고 나서는 책상에 앉아 글을 고치는 일이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다”며 “여러 사람과 직접 만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을 받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북스테이 문을 열었다”고 했다. 1만4000여 권의 책이 준비된 공간 곳곳에는 이곳을 다녀간 2만4000여 명의 여행자가 쓴 방명록이 수필집처럼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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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구비된 경북 경주시 경주 사랑방서재




제주도 제주시 ‘오, 사랑’에서는 책에 파묻혀 밤을 보내는 판타지를 경험할 수 있다. 이곳의 주인장은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담당했던 15년차 방송작가다. 지난 7월 문을 연 이곳은 낮에는 서점으로, 밤에는 북스테이로 운영된다. 평소 책을 좋아하던 운영자는 서점 옆에 작은 숙박 공간을 마련했다. 영업시간이 지난 저녁에는 서점 전체가 여행자 전용 공간이 된다. 경북 경주시 ‘경주 사랑방서재’는 한의사와 음악가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한옥에 꾸며진 경주 사랑방서재에는 일주일에 한 팀만 묵을 수 있다. 매달 ‘사랑방학교’ ‘과학 이야기’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주제의 강좌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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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며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전남 고흥군 가고파 그 집


어린 자녀와 이야기꽃


어린 자녀와 함께 즐기기 좋은 공간도 있다. 충남 금산군에 위치한 ‘금산 지구별 그림책마을’은 책으로 온 가족이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가 읽기 좋은 그림책이 많이 구비돼 있으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버스 도서관, 별을 볼 수 있는 야외 정원, 동요·왈츠·재즈 등을 들을 수 있는 음악감상실 등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의 ‘지지향’도 아이를 동반하기에 적당하다. 북스테이 아래층에는 어린이 도서부터 소설·수필 책 등이 있는 도서관 ‘지혜의 숲’이 있다. 이곳은 24시간 운영하기 때문에 밤새 아이와 책을 읽을 수 있다. 지지향에는 박완서·고은·김훈 등 국내 유명 작가의 전집과 소장품으로 꾸며진 작가의 방이 있어 관련 작가 책을 읽어본 중·고등생 자녀와 함께 묵으면 좋다. 지난 1월 강원도 속초시에 문을 연 ‘완벽한 날들’에도 영유아부터 어른이 볼 수 있는 그림책이 비치돼 있다. 숙박 공간 외에도 카페가 있어 부모는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아이는 그림책을 읽을 수 있다.

송수연 금산 지구별 그림책마을 담당자는 “이곳을 찾는 가족들은 아이에게 ‘공부해, 책을 보라’고 잔소리하기보다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경향이 있다”며 “아이들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오히려 더 책과 친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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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딸린 작은 방에서 묵 을 수 있는 제주도 제주시 오, 사랑


북스테이가 새로운 문화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있다. 책을 통한 소통과 휴식을 목적으로 생겨난 북스테이가 상업적으로 변질돼 개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안수 헤이리 예술마을 촌장이자 모티프원 대표는 “북스테이는 운영자의 개성과 다양한 도서, 여행자의 이야기가 모여 건물 자체가 커다란 ‘책’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라며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규격화한다면 다른 숙박업과 다를 바 없다”고 조언했다.

글=라예진 기자, 사진=프리랜서 조상희, 각 북스테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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