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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53년 베테랑 가위손… 이회창도 정몽근도 '머리'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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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수가게'를 찾아서] [4] 70년 넘은 '문화이용원' 반세기 지킨 이발사 지덕용씨

손님에 어울리는 스타일로 1명에 1시간 넘게 공들여

머리 자르러갔다 일 배우기 시작

2012년 손가락 관절염으로 관둬… 단골 요청으로 1년만에 '복귀'

'사각사각.' 서울 종로구 혜화동 문화이용원의 이발사 지덕용(79)씨가 손님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소리가 가게를 채운다. 53년 경력의 이발사는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리고 빗질을 해가며 정성스럽게 가위를 놀린다. 30여분에 걸친 이발이 끝나면 의자를 뒤로 젖혀 면도를 시작한다. 수증기로 적셔 낸 수건을 손님 턱에 올리고 얼굴 곳곳에 크림을 발라 면도칼로 섬세하게 수염을 깎는다. 마지막으로 가게 한쪽에 있는 세면대에서 손님의 머리를 감겨준다.

조선일보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문화이용원에서 이발사 지덕용(79)씨가 손님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지씨는 1959년부터 이곳에서 일하며 많은 단골을 만들었다. 날을 갈아 사용하던 면도칼이 일회용으로 바뀌고, 비누거품은 면도용 크림으로 바뀌었지만‘손님에게 어울리는 머리를 해 준다’는 철학은 변함없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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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한 명을 이발하는 데 들이는 시간은 1시간이 넘는다. 지씨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손님에게 어울리는 머리를 해주는 게 내 이발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가 운영하는 이 이용원은 최근 강남, 홍대 인근에서 인기인 고급 이발 전문점 '바버숍'의 원조 격이다. 요즘 전문 바버숍에 가면 서비스에 따라 4~13만원을 내야 한다. 지씨는 1만 3000원을 받는다.

그 동안 수많은 정치·사회·재계 인사들이 지씨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 선생과 아들인 이용희 전 통일부장관, 국어대사전을 편찬한 독립운동가 이희승 선생, 이회창·이수성 전 국무총리 등이 단골이었다. 박두병 전 두산그룹 회장, 조홍제 전 효성그룹 회장도 이곳에서 이발을 했다.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두 번씩 이 허름한 가게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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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된 요금표 문화이용원에서 보관 중인 1961년‘이용협정요금표’. 요금이 당시 화폐 단위인 환(圜)으로 표시돼 있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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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들로 가득한 지씨의 가게는 단골들에게 편안함과 익숙함을 안긴다. 팔걸이에 재떨이가 있는 옛 이발 의자, 오래된 타일이 박힌 세면대, 열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옷장…, 길게는 60년쯤 세월의 때가 묻은 것들이다. 지씨는 1961년 당시 화폐인 환 (圜) 단위로 표시된 '이용협정요금표'도 보관하고 있다. 평생 단골이라는 강모(79)씨는 "다른 사람들은 여기 있는 물건들이 낡아빠진 것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손 붙잡고 드나들던 사람들에겐 모두 추억"이라고 말했다.

누가 언제 문화이용원을 개업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략 1940년대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 버려진 이용원을 지씨 직전 주인이 인수해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씨는 이 이용원을 손님으로 찾았다가 '이발 기술을 한번 배워보지 않겠냐'는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0년대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등굣길에 '장발 규정'을 어기지 않으려고 온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섰다고 한다. 한창 때는 10평 남짓한 이용원에 이발사만 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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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미용실로 가고, 바버숍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지금은 지씨 혼자 문화이용원을 지키고 있다. 그는 지난 2012년엔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평생 이발을 하느라 손가락 관절염이 왔기 때문이다. 은퇴 생활은 길지 않았다. 단골들이 지씨만 찾는 통에 2013년 다시 가게를 맡았다. 요즘도 손가락 통증에 매일 약을 먹어야 하지만 오전 8시 30분이면 하얀 이발 가운을 갖춰 입고 손님을 기다린다. 지씨는 "머리 뿐 아니라 추억을 만지는 이발사로 혜화동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해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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