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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작은 방 한 칸 구해 딱 한 달만 살고 싶은 곳 `가마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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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가마쿠라에 있는 오래된 사찰 하세데라(長谷寺)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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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일본문학 기행-45]

내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가마쿠라(鎌倉)다.

가마쿠라에는 아름답고 예쁜 거리가 있고, 따뜻하고 맛있는 커피가 있으며, 중독성 있는 라면집이 있다. 지나가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장소에도 풍성한 수국과 보랏빛 붓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곳이다. 작고 단정한 집들이 모여 있는 이름 없는 골목들 사이로 협궤열차가 지나가는 곳. 그곳이 가마쿠라다.

가마쿠라는 인간에게 평온과 기쁨, 예술과 교양, 자연과 소소한 일상, 그리고 죽음까지 모두 누리라고 만들어진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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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쿠라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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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스럽지 않지만 모든 것의 핵심이 존재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격조가 있고, 그리고 그곳에 스며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공존하는 곳, 그곳이 가마쿠라다.

도쿄 남쪽 도심에서 불과 전철 40분 정도 거리에 자리 잡은 가마쿠라는 작은 집 하나 구해서 몇 달만이라도 살고 싶은 그런 곳이다.

가마쿠라에는 또 역사가 있다. 한 시절 일본막부의 수도였고, 일본 선불교의 일파인 니치렌종(日蓮宗)의 요람이었던 가마쿠라에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정갈한 사찰들과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마쿠라 고잔(五山)이라고 불리는 5대 사원인 엔카구지(円覺寺), 겐초지(建長寺), 주후쿠지(壽福寺), 조치지(浄智寺), 조묘지(淨妙寺)에서부터 하세데라(長谷寺)와 쓰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 신사까지 히말라야 삼나무 숲에 둘러싸인 사원을 산책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을 남겨준다.

가마쿠라에는 바다가 있다. 한국의 청춘들이 열광했던 '바닷가 마을 다이어리'의 무대가 된 바다도, 소설과 드라마로 유명한 '츠바키 문구점'의 무대가 됐던 그 바다도 가마쿠라에 있다. 만화 '슬램덩크'에 나오는 바다와 철길 건널목도 모두 가마쿠라에 있다.

이곳 바닷가 풍경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갈 때마다 내 발목을 잡았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에서는 서퍼들의 웃음이 들려오고, 그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곳. 생선 비린내와 빵 냄새가 함께 있는 곳. 바로 가마쿠라의 바다다.

가마쿠라에는 문학과 예술이 있다. 송나라의 인쇄기술이 일본에서 가장 먼저 도착했던 가마쿠라는 아주 오랫동안 일본 교양과 문학의 산실이었다. 이미 오래전 가마쿠라는 '고잔분가쿠(五山文學)'라는 선불교 문학을 탄생시켰다. 가마쿠라에 있는 5개의 대형 사찰(五山)을 중심으로 꽃을 피운 불교문학은 후대 수많은 일본 문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전통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1889년 요코스카 선이 개통되어 가마쿠라가 도쿄와 가까워지면서 많은 작가들이 도쿄를 떠나 하나둘 이곳에 정착한다. 나쓰메 소세키, 다카미 ??, 구메 마사오, 나카야마 기슈 등 일본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이곳에 집이나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가마쿠라 문고'를 냈을 정도다.

1936년에는 당시 일본을 대표하던 영화사인 마쓰타케(松竹)가 촬영소를 가마쿠라 북쪽 오후나로 옮기면서 영화 관계자들과 배우들도 속속 가마쿠라에 정착하게 된다.

내 생각에 일본 문화예술계에서 가마쿠라의 위치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유파(流派)다.

'무기 창고'라는 의미를 지닌 이곳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여가와 예술과 종교를 감싸 안은 도시가 됐는지 아이로니컬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마쿠라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다.

야스나리는 1937년 가마쿠라시 니카이도로 이사한 이후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 1972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가마쿠라에서 보냈다. 가마쿠라의 거리와 바다는 야스나리의 마지막 35년을 고스란히 지켜본 곳이다. 야스나리의 중요한 후반기 작품인 '천우학(千羽鶴)' '산소리(山の音)'의 무대도 바로 가마쿠라다. 야스나리의 무덤도 가마쿠라에 있다.

그렇다. 가마쿠라는 야스나리가 완성되고 죽어간 곳이었다. 나는 그의 마지막을 보러 가마쿠라로 간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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