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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friday] 솔잎·갈잎·댓잎을 짚신 삼아… '남도의 小金剛' 숨은 옛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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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첫선 보인 '땅끝의 고도'… 해남 달마고도

곡괭이·삽·호미로 낸 길

달마산 훼손 최소화하려 중장비 들이지않고 길 내 흔한 나무계단 하나 없어

달마산의 골격을 더듬다

관음·돌비탈·숲 이어져 4개 코스 지루할 틈 없어

큰바람재 다다르면 저 멀리서 다도해가 '반짝'

코스의 시작과 끝, 미황사

신라시대 지은 1300년 고찰, 대웅보전의 물 빠진 기둥서 계절의 씁쓸한 운치 느껴져

조선일보

달마고도가 부려놓는 여러 수묵화 중 가장 극적인 구도는 도솔암에 있다 할 것이다. 이곳의 바위는 바람이 강렬할수록 색이 진해진다./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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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신작로로 다니지 않는다. 역사가 오랜 것들은 뒷길로 다니며, 그 길은 몇 발만 걸어도 어느덧 옛길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 길을 고도(古道)라고 부르려 할 때 그 고도의 고도(高度)는 고도로 고독하다. 고도는 때로 고도(苦道)이며 길 위에서 고통으로 숨이 끊어지려는 여러 중생이 발견되기도 한다. 고도는 옛길이지만 구도(舊道)는 아니다. 고도는 고도(孤島)가 아니다. 고도는 골동(骨董)도 아니다. 고도는 기도(祈禱)에 가깝다. 고도를 걸을 때 마음은 고동치는 대신 고대로 가라앉는다. 고도는 구도(求道)와 어울린다. 그래서 고도는 겨울에 걸어야 한다. 구두를 벗어야 갈 수 있다.

전남 해남의 달마고도(達摩古道)에 닿기 위해 땅의 끝으로 갔을 때, 달마산의 단풍은 거의 고통스러웠다. 고도가 처음 속세에 몸을 연 지난 18일 바람은 초속 20m에 육박하는 최대 풍속으로 불어왔다. 남도에 곧 겨울이 들 것이다. 나무를 떠나는 잎들은 바랜 얼굴로 승복(僧服)을 찾아 입을 것이다.

달마고도는 미황사와 큰바람재와 노시랑골, 몰고리재 등 달마산의 주 능선을 아우르는 18㎞ 둘레길이다. 1300년 고찰 미황사의 옛 12개 암자를 잇는 순례 코스로, 중국 선종(禪宗)을 창시한 달마대사의 법신(法身)이 상주한다는 믿음과 더불어 과거 선인들이 걷던 옛길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1년간 정비해 총 4개 코스로 단장한 이 길은 곧 남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는 달마산의 골격을 더듬는 길이다.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은 "위태로운 꼭대기를 타고 오르는 대신 아름다운 산속 숨은 옛길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면서 "산의 훼손을 최소화하려고 일체의 중장비 없이 곡괭이와 삽과 호미와 지게로만 돌과 흙을 날라 길을 폈다"고 말했다. 달마산에서 28년을 살아온 금강 스님은 "사람이 산에 깃드는 길"을 매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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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위가 무너져내려 광활하게 펼쳐진 너덜지대가 지극한 이계(異系)의 건널목처럼 보인다. 2 달마고도 제2코스 구간에 이르러 옆으로 바다가 탁 트인 길 하나를 마주한다. 3 달마고도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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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일주문(一柱門)을 지나칠 수가 없다. 미황사에서 출발하는 제1 코스를 택한다. 신라 경덕왕 때 지어진 한반도 최남단 고찰이 달마산 돌병풍을 두르고 있다. 다음 계절이 나무가 말라가는 색으로 오는 것이라면, 대웅보전의 물 빠진 느티나무 기둥이 보여주는 느릅나뭇과의 조용한 마모 상태가 그러하다. 주춧돌에 게와 거북이가 새겨져 있다. 인도에서 부처님상을 싣고 땅끝 사자포구에 닿은 한 척의 돌배를 상징한다. 서역 인도 땅은 이곳에 깊게 관여한다. 창건 설화에도 인도 왕을 자처하는 금인(金人)이 의조 스님의 꿈에 나타나 "소에 경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을 봉안하라" 일렀다 전해진다. 소는 외마디 길고 아름다운 울음을 남기고 쓰러졌고, 그 자리에 미황사가 들어섰으니, 불어오는 바람마다 햇빛에 반사되는 황금빛 터럭이 묻어 있다.

달마고도엔 산책로의 그 흔한 나무 덱(deck) 하나 없다. 다만 흙길 위에 스러진 솔잎과 댓잎과 갈잎이 기꺼이 짓밟히며 짚신이 돼 주려 한다. 미황사를 나서 숲길 따라 1㎞쯤 가면 임도(林道)가 나오고, 그 길로 조금 가면 규암(硅岩) 수천 개가 거대한 염주알처럼 쏟아져 있는 너덜 지대가 나타난다. 골짜기부터 흘러내린 흰 바위 떼. 그것은 바위의 무덤처럼 보인다. 바위에 부적처럼 붙어 오르는 붉은 담쟁이가 보인다. 바위의 추운 몸을 위로해주려고 바위틈에 웅크린 푸른 이끼와 낮게 포복한 관목이 보인다.

한 개의 너덜 지대를 더 지나 흙길을 걷는다. 서역에서 오는 찬 바람을 맞을 때마다 사념 가득한 머리통에서 불량한 습기가 빠져나간다. 발치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불교에서 고도(苦道)는 그릇된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일으켜 얻은 괴로움을 일컫는다. 숲이 깊어질수록 잎이 희박해지는 나무를 따라 해본다. 입을 버릴수록 줄기가 가까워진다. 달마는 경전 대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 수행법이 걷기와 닮아 있다. 달마가 죽고 관을 열어보니 짚신 한 짝만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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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 푸른 숲의 속살이 있다. 2 등산로의 낙엽이 알아서 멍석을 깔아준다. 3 미황사 하나만으로 해남에 와야 할 이유가 성립한다. 4 지역 명물로 자리 잡은 해창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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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는 큰바람재에 이르자 풍경에 바다가 추가된다. 해남 출신 시인 고정희는 생전에 남긴 시 '남도행'에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마음을 주다가/ 문득 두 손 모아 절하고 싶어라" 하고 노래한 적이 있다. 남쪽으로 펼쳐진 다도해, 완도와 진도와 보길도의 웅크린 등이 보인다. 물 위의 바위, 섬으로 불리는 거대한 조약돌이 반짝이며 이곳이 해남(海南)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는 바람이 불고 불지 않아도 도량(度量)이 변하지 않는다. 바다를 면한 길이 오래 이어진다. 사람들이 가끔 멈춰 서 두 손을 모은다.

달마산은 높은 산이 아니다. 고도가 489m에 그친다. 다만 관음과 불썬과 떡봉의 어깨, 너덜겅과 편백나무숲 등이 전설과 함께 늘어서 있어 심심할 수 없다. 큰바람재부터 노지랑골 사거리를 잇는 2코스 근처에 금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된 유서 깊은 못이다. '달마산 꼭대기 고개 동쪽에 천길이나 되는 절벽 아래 미타혈(彌陀穴)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은 앉을 만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고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법력이 얕은 탓인지 잘 보이지 않으나 이미 이야기만으로 갈증을 잊는다.

노지랑골 사거리부터 편백나무숲을 지나 몰고리재까지 연결되는 제3 코스가 있고, 몰고리재에서 다시 미황사로 이어지는 제4 코스까지 전체 구간을 걷는 데 6시간 정도가 걸린다. 내년 1월부터는 주말마다 트레킹 가이드와 동행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제4 코스에 이르러 도솔암으로 빠지는 샛길이 보인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풍이 기암 사이로 몰아친다. 내면은 오래될 수록 단단해지는 것이어서 도솔암 불상 앞에 놓인 향은 바람에 아랑곳없이 연기를 수직으로 피워올린다. 미황사로 내려와 지는 해를 본다. 빨갛게 대웅보전 앞에 송지우체국 우체통이 놓여 있다. 기와불사 하듯 뭔가를 적어 넣고 싶어진다. 그것은 작별 인사가 될 것이다. 다실에서 끓여내는 연잎차처럼 바람이 잠시 잠잠해진다.

해남에 닭회가 유명하다는 얘기를 듣고 잠깐 회가 동했으나, 곧장 살코기를 입에 대기 차마 불경스러 발길을 돌린다. 곡차(穀茶)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차로 30분 정도를 달려 해창주조장에 닿는다. 10년 전 귀농해 막걸리를 빚고 있는 이곳 오병인(57) 사장이 통째로 삶은 넓적한 조개를 건넨다. 감미가 없는 12도짜리 걸쭉한 쌀의 시간을 들이킨다. 하산해 있던 온몸의 고도가 다시 확 올라간다. 다시 나서는 길. 길가의 억새가 내려앉는 낙조를 향해 몸을 굽힌다. 저 배웅의 몸짓에 눈이 부시다.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가을은 멀리 떠났으나 또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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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달마고도


내년 1월부터 트레킹 가이드 10명이 주말마다 배치된다. 동반 산행과 길 해설 등을 맡는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 (061)530-5229

미황사

조선 후기에 제작된 높이 12m·폭 5m의 보물 1342호로 지정된 대형 괘불(掛佛)이 모셔져 있다.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하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 경전 읽기 모임이 열린다. (061)533-3521

해창막걸리

150m 지하에서 길어 올린 물로 막걸리를 빚는다. 감미료를 넣지 않아 단맛이 적고 5도와 9도, 12도짜리가 있다. 40여 종의 수목을 갖춘 예쁜 야외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전남 해남군 화산면 해창길1. (061)532-5152

[해남=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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