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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조문환의 지리산별곡 27] 큰 바위 얼굴 지리산 천왕봉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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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천왕봉)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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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 지리산둘레길을 돌면서도 내 머리에는 늘 천왕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둘레길 칠 백리 사방팔방을 돌고 돌아도 북극성처럼 늘 그 자리에서 나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언뜻 한 번씩 그 모습이 나타날 때면 내 가슴은 설레었었다.
둘레길을 돌 때만이 아니었다.
지리산 주변을 여행을 하다가도 한 번씩 보일 때면 나도 모르게 “어, 저기 천왕봉이 보인다 천왕봉”라고 외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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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치고 천왕봉에 올라 보지 못한 사람 몇 안 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천왕봉은 큰 바위 얼굴,
늘 말없이 나를 참아 주고 기다려 주는 큰 형님이자 아버지처럼 여겨졌었다.

그동안 몇 차례 천왕봉 정상을 올랐었지만 피상적으로 그 봉우리만 밟고 왔었다.
이번에는 늘 꿈꾸어 왔던 주능선을 따라 걸어 보고 싶었다.

벽소령 어디쯤엔가 우두커니 서서 한참 능선을 응시하다가도
북쪽의 함양으로, 금산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를 바라보고 싶었고
그 너머로 더 올라가 소백산, 설악산, 금강산, 그리고 백두산 까지 내 마음을 보내 보고 싶었었다.

또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작은 동네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 가슴 시린 모습을 내 손으로 잡아 보고 싶었으며
누나들이 고무줄놀이 하는 그 서정적 모습을 내 눈으로 그려보고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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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반에 맞춰 놓은 알람이 깨웠다.
구례까지는 아내가 차를 태워 주고 거기서 부터는 미리 예약해 놓은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올라가
네 시 반부터는 등반을 할 계획이었다.

양력으로 오월 구일, 봄기운이 향긋하다.
구례터미널에 도착하여 개인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올랐다.

이미 동쪽 하늘은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다소 바람이 싸늘하다.
아무도 없는 등산로를 홀로 걸어갔다.
바람소리, 새 소리,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뿐 이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 내내 택시 기사가 해 주었던 말이 자꾸 되뇌어졌다.
“빨리 걷지 말어요. 노략질 허면서 걷는 거여요 노략질”
그의 말은 처음 지리산 종주에 나서는 나에겐 대 선배의 기막힌 원포인트 레슨과도 같았다.

“그래 노략질 하면서 걷는 거야, 놀면서, 즐기면서 걸어가자”
기사 아저씨의 그 한 마디 충고는 이틀 내내 내 산행의 중심을 잡아 준 교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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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 서서 내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번갈아 보았다.
남원과 구례 쪽 산 아래에서는 섬진강이 만들어 낸 안개가 계곡의 아랫부분부터 채워 오고 있었다.

내가 걸어가야 할 지리산 주능선 너머 천왕봉이 저 멀리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 하고
그 중간 즈음에서는 반야봉이 지남철처럼 나를 잡아당긴다.

등산로에는 이제야 버들강아지가 피어나고
고목나무는 아직도 이파리가 피어나려면 달포는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반야봉까지 가는 등산로에는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이 뿌리를 하늘로 향한 채 쓰러져 있었다.
지난여름에 폭풍우에 휩쓸려 쓰러진 것들이리라.

이들은 세월의 흐름에 스스로를 맡기고 바람이 되고 흙이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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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의 지리산 종주 내내 눈에서 떠나지 않았던 봉우리 반야봉은
그 생김새가 뭉텅하고 너무 편안하여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노고단 고개에서 약 5킬로미터를 걸어와 노루목에서 반야봉 삼거리를 지나 반야봉에 올랐다.
처음 맞이하는 가파른 등산로다.

반야봉에 홀로 앉아 겹겹이 쌓인 산들을 바라보았다.
대양에서 만들어 낸 파도처럼, 산들의 능선이 만들어 낸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왔다.

목포에서, 마산에서 밀려오고 밀려오기를 쉬지 않는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산줄기 파도를 타고 반야봉으로 넘실거리며 올라오는 듯하다.


봉우리 정상부위의 철쭉은 지난 주 내렸던 눈으로 채 피어 보지도 못하고 얼어 버린 채 말라 버렸다.
이대로 여름을 맞이하고 또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삼도봉 아래 산비탈면은 마치 비단을 깔아 놓은 듯 태양빛에 반사되어 빛이 피어올랐다.
이제 막 움이 트는 이파리들과 태양빛의 만남이 이루어 낸 판타지와도 같았다.
저 비단길을 타고 내려가면 구례의 어느 작은 산자락 마을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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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은 지리산이 얼마나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경상남도가 시작되고 모이는 장소다.

주물로 만들어진 삼도봉 표지석에 배낭을 쉬게 하고 삼도를 두루 살펴보았다.
내가 올랐었던 반야봉이 바로 내 머리 위에 있어 보인다.
지리산이 하나이듯 전라도와 경상도가 둘이 아닌 하나로 묶여지기를 소망한다.


새벽에는 싸늘했던 공기가 점심 무렵에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때에 맞춰 연하대피소에는 등산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서 좁디좁은 하늘을 가진 연하대피소의 고목나무에서는 새 순이 돋아나고
이제야 제대로 된 봄기운이 도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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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형제봉을 지나 벽소령에서 하룻밤을 묵을 작정이다.
벽소령은 하동과 함양의 경계 지점에 있다.
벽소령 아래 첫 마을은 하동의 의신마을로서 이 마을에서는 한 눈에 형제봉과 벽소령을 조망할 수 있다.

한 번씩 의신마을에서 형제봉과 벽소령 쪽을 바라보면 이들이 바로 삶의 지척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개인택시 기사의 조언대로 노략질 하듯이 해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산행을 즐겼다.
덕분에 지리산 능선의 작은 꽃들과 참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얼레지는 보랏빛을 선명하게 분출하고 고목 아래와 언덕 빼기에 군락을 지어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공원을 관리하는 직원에게 물어서 그 이름을 알게 된 하얀 개별꽃도 한창이었다.
나무들의 생김생김, 들풀들의 나부낌 까지 관찰하고 이들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구상나무는 그 홀로 온갖 자연 풍상을 다 겪은 나무처럼 고고하였다.
주능선 정상에서 만나는 구상나무들을 볼 때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 나무에서 겨울 눈보라 소리들이, 여름 폭풍과 천둥번개 소리들이 들리고 보이는 듯하다.

불멸의 나무로 알려져 있는 구상나무가 왜 지리산에서 유독 많이 자생을 하는지 알듯하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그 뿌리를 함께 해 온 지리산과 구상나무는 맥을 같이 하지 않을까?

지리산의 나무들을 가만 보면 굽어지고 뒤틀린 나무들이 많아 보인다.
고목이 되어 기둥 부위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 사이로 기생 식물들이 또 서식하는 기형적인 모습들도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다.

죽은 나무에 터를 잡고 피어나는 개별꽃은 차라리 앙증맞은 모습이다.
자연은 죽지만 결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영속적인 모습에 끈기와 인내가 느껴진다.

부러지고 잘려 나간 나무가 남겨 놓은 옹이도 지리산에서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상처 입었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상처 입은 자 만이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 다가가 만져 본다.
그 움푹 파인 곳에 손을 얹어 보고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 보기도 한다.

부스럼 같은 촉감, 하지만 귀를 대어 가만 들어 보면 그에게서 “널 사랑 한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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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무렵이었다.
좁은 공간의 대피소는 사람으로 만원이다.
저녁 시간에 할 일이 만무한 대피소는 밤이 일찍 찾아온다.
아니 일찍 밤을 청해야만 하는 곳이다.

새벽 다섯 시에 맞춰 놓은 알람에 깨어 조심스럽게 짐을 꾸리고 천왕봉을 향했다.

지리산의 첫 공기를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갓 깨어난 산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어 보고 싶었고
남해 저 멀리에서 용솟음치는 태양빛이 처음 발하는 그 기상 넘치는 빛을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는 생각보다 태양이 일찍 떠올랐다.
다섯 시가 되자마자 생기가 돌고 산이 동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봉우리부터 조명이 비춰지고 점점 그 조명이 밝아지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어쩌면 산행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싶다.
태양으로부터 시작된 기운이 산을 깨우고 우주 만물에 생동감을 더해 주는 바로 이 시간,
그래서 나도 그 가운데 하나의 자연이 되어 같이 깨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음에 대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음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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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늘 천지창조와 종말이 함께 일어나는 곳이다.
이제 막 움을 틔우며 태어나는 작은 나무들,
어느 곳에든지 움이 트고 생명이 약동한다.

바로 그 자리에 천년 묵은 고목이 쓰러져 있고 그 나무가 먼지가 되고 바람이 되어 사라져 간다.

내가 살아가는 한적한 작은 동네 그곳도 이곳 지리산과 다름없으리라.
누군가 떠난 자리에 또 누군가 태어나고
그래서 지금의 나와 내 아들이 있고 그들의 후손들이 이 땅을 또 지켜 나갈 것이다.


촛대봉에서니 바람이 강했다.
아래에서는 느끼지 못할 바람이 온통 몸을 휩쓸어 갈 지경이다.
저 아래 세석대피소가 마치 병아리처럼 작아져 보이고 드디어 천왕봉이 손에 잡힌다.

여전히 나의 큰 형님처럼 든든히 서 있는 반야봉,
내가 지나온 길을 그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반야봉 뒤를 지키고 서 있는 또 다른 작은 거인 노고단,
늘 노고단은 나서기 보다는 기다려 주고 맞이해 주는 베이스캠프였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모든 이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해 준 숨은 조력자다.

나도 누군가에게 반야봉으로 서 있어 주고 싶다.
말없이 기도 해 주는 영원한 베이스캠프 노고단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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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리산에 와서야 깨달았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땅,
그 주변에 작은 산들, 작다고, 이름 없다고 하찮게 여겼던 산들과 봉우리들과 계곡과 재들이
천왕봉을 향하는 주능선에서 보면 어쩌면 그렇게 늠름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지,
그 생김새 하나하나가 얼마나 또렷하고 구김 없고 잘생기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천왕봉을 향하는 지리산 주능선에 서고서야 깨달은 선물이다.


내가 사는 집에서 손잡을 듯 보이는 백운산,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올라가 세상을 향해 소리 지를 수 있는 형제봉,
아침마다 눈만 뜨면 바라보이는 구재봉,

지난 달 바람이 몰아치는 날 아침에 올랐던 백운산 계곡의 한재,
남해바다를 지키고 서 있는 금오산,
내 어릴 적 뛰어 놀았던 동네의 이름 없는 작은 산과 계곡들도
지리산 능선에서 보면 내 손의 지문들처럼 그렇게 선명할 수 없다.

이들은 늘 언제나 지리산과 대화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지리산을 사모하고 천왕봉을 그리워하듯 말이다.

사랑 한다 너희들아,
내가 너희들로 인하여 이만큼 자랐음에 감사한다.

제석봉에서 나의 지나온 길들과 또 남은 길들을 바라보면서 새 힘을 얻었다.
지리산은 멀리서 보면 오히려 가깝고 가까이에서 보면 멀어지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나만의 일일까?

제석봉에서 본 천왕봉은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다.

저 아래 장터목 대피소가 보인다.
저 고개만 올라서면 바로 천왕봉이다.
성삼재에서 30킬로미터, 그리 멀지도, 그렇다고 그리 가깝지도 않은 묘한 거리다.
그는 나의 활동 반경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나의 큰 바위 얼굴이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없는 듯 있었고 높은 산임에도 낮은 자처럼,
유명함에도 무명한 것처럼 서 있는 천왕봉,
그 모습 속에서 사람을 살리며 변화시키며 오래 기다려 주는 큰 바위 얼굴이 보였다.

영겁의 세월 속에서도, 마르고 닳도록 기나긴 시간 속에서도
그렇게 큰 바위 얼굴로 오늘의 나를 지켜 주었듯이 내일의 누군가를 또 지켜 주리라.

큰 바위 얼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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