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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유아교육 혁신안은 왜 ‘영어수업 금지 논란’이 됐나 [더(The)친절한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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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The) 친절한 기자들]

소외계층 성장권 담은 첫 유아교육 정책

기존 정부와 다른 전인적 교육철학 선보여

“교육 패러다임 바꾸는 획기적 안” 평가에도

섬세한 정책 접근 부족, 학부모 여론 뭇매


한겨레

서울 은평구의 한 어린이집 원아들이 장난감 놀이터에서 ‘나무동굴’에 들어가 놀이 중 잠시 쉬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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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의 자유놀이 권장”, “유아가 중심이 되는 교육”, “생애 출발점 단계의 교육격차 해소”, “저소득층, 다문화, 장애 유아의 성장할 권리 보장”….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12월27일 기존의 유아교육 정책과 전혀 다른 혁신방안을 선보였습니다. ‘출발선부터 동등하게’라는 이름을 내걸고 나온 ‘유아교육 혁신방안’에는 기존의 유아교육 정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전인적 교육철학이 담겨 있었습니다. “모든 유아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라는 목표로 저소득층 유아의 국공립유치원 우선 취원, 다문화 유아를 위한 ‘다문화 유치원’ 확충, 장애 유아를 위한 ‘통합 유치원’ 설립 등이 포함됐습니다. 유아 단계에서부터 교육 격차가 벌어지지 않게끔 교육기회의 평등을 국가가 보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정책 취지에도 불구하고 혁신방안을 내놓은 뒤 한 달 동안 교육부는 뜨거운 여론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지난 20여일 간, 여론을 뜨겁게 달군 논란의 초점은 저소득층 우선 취원도, 다문화·장애 유아의 성장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조기 영어교육’이었는데요. 유아들에게 놀이중심의 교육을 하겠다는 ‘유아교육 혁신방안’ 뒤로, 교육부는 올 3월부터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영어수업을 금지하는 방침을 추진해왔던 것입니다. 선행학습금지법에 따라 올 3월부터 초등학교 3학년 이하의 공교육에서 영어수업이 금지되는데,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수업과 함께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도 영어수업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죠. 하지만, 구체안을 밝히지 않고 추진했던 까닭에 더욱 ‘뜨거운 감자’가 됐습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금지할지 20여일간 ‘묵묵부답’하던 교육부는 지난 16일 금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1년 유예하면서 급히 발을 빼버렸습니다. 결국, 쟁점에 불만 붙이고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요.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유아교육 혁신안은 어쩌다 한 달만에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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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의 한 어린이집 원아들이 장난감 놀이터에서 ‘침대’에 들어가 놀이 중 잠시 쉬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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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교육은 1달러 투자하면 16.14달러 편익이 생긴다?

당초 새 정부가 발표한 유아교육 혁신방안은 전문가들에게도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나정 동국대 교수(유아교육학)는 “지금껏 정부는 유아를 인적 자원으로 바라보고 어릴 때부터 많은 학습을 시켜 어떻게 하면 국가가 활용할 인재로 성장시킬 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며 “유아가 충분히 쉬고 뛰어놀면서 배우게 하겠다는 이번 방안은 최근 10년 동안 제시됐던 기존의 유아교육 정책과는 색이 완전히 다른 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나 교수는 “평생 유아교육을 전공한 내가 살면서 이런 혁신적인 방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유아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정부의 유아교육 정책에 ‘놀이 중심’, ‘아이 중심’이란 키워드가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했던 ‘유아교육 선진화 추진 계획’(2009)을 보면, 정부는 “영유아기의 인적자원 투자 대비 편익 비율이 가장 크다”며 “유아교육 1달러 투자시 16.14달러의 편익이 발생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3~4살 아동의 유치원 및 어린이집 취원율이 낮아 미래 인적자원의 체계적 개발을 저해한다”며 “미래인적자원의 조기개발을 위해 유아교육 선진화 추진에 국가적 역량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유아를 투자의 대상으로 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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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인천 남동구에 있는 한 국공립 어린이집을 방문해 그림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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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살 보편적 무상 교육과정 도입했다지만…

누리과정(3~5살 유치원·어린이집 공통 과정)을 처음 도입한 박근혜 정부도 유아 무상교육 체계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만, 양적 확대에 그쳤을 뿐 세부적 교육철학은 이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아교육발전 5개년 계획’(2013년)에는 정부가 만 3~5살 유아를 위한 유아 무상 공교육 체계를 구축하는 배경으로 “글로벌 추세에 부합하는 유아교육 체제 마련”을 들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는 “유아의 기본 ‘능력’에 기초한 ‘핵심역량’을 기반으로 누리과정 내용을 구성하라”고 강조하면서,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연계한 해설서와 교사용 지침서 등을 누리과정 교육내용으로 마련하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정책 방침으로 인해 만들어진 누리과정은 지나치게 ‘학습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많은 내용을 가르치느라 유치원 현장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임재택 부산대 명예교수(유아교육과)는 “획일적 누리과정 아래서 유치원 교사는 13권에 이르는 교사용 지도서에 따라 아이들을 학습시키고, 하루 5장 분량의 교육계획안을 매일 작성해야 한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가두리 양식장’에서 기르는 것처럼 해왔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같은 ‘학습중심’의 누리과정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맘껏 뛰놀고 또래들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사회성 발달에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미리 준비한다는 개념으로 학습에 집중해야 했고, 교사들은 지나치게 세부적이고 복잡한 지도서로 가르쳐야 했습니다.

특히, 누리과정에도 접근하기 어려운 다문화 유아, 장애 유아는 유치원에 다니고 싶어도 가기 어려웠습니다. 지금껏 장애 유아가 특수 교사와 유치원 교사의 공동 담임 체제 아래 제대로 교육 받을 수 있는 ‘통합유치원’은 전국에 한 곳 있을 뿐입니다. 다문화 유아의 언어발달을 지원하는 ‘다문화 유치원’도 현재 전국 90곳에 불과합니다. 다문화 유아는 전국 12만여명이나 되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유아기 자녀를 자연과 함께 뛰놀게 하면서 정서적 감수성과 사회성을 먼저 길러주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7살 아이를 기르는 김아무개(37)씨는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7살 아이를 맘껏 놀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다만, 나중에 학교에 입학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질까봐 걱정이 되는 것인데, 정부가 모든 유아를 대상으로 ‘놀이 중심’으로 가겠다고 하면 오히려 반갑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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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송정제방산책로 매미학습장에서 유치원생들이 매미관찰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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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정부의 남다른 교육철학, 왜 공감받지 못 했나

하지만, 유아를 투자의 대상이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 보고 소외계층 아동의 성장권까지 고려했던 새 정부의 남다른 교육철학은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전혀 공감받지 못 했습니다. 지난 한 달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방과후 영어 수업을 금지할지에 대해서만 치열하게 논의하고 끝났습니다. 오히려 ‘갈팡질팡’, ‘오락가락’하는 교육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정부가 공들여 내놓은 유아교육 정책이 이처럼 국민들의 정서와 큰 괴리감을 나타내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 입시를 겪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를 갖기 위해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사회 구조는 그대로인데, 이는 그대로 두고 ‘놀이’ 교육을 강조하니 학부모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는 17일 성명에서 “유아교육 혁신안도 입시 개혁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유아부터 대학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영어유치원(유아 영어학원)을 비롯한 사교육업체의 영어 선행학습은 그대로 둔 채, 학교 방과후나 유치원·어린이집 영어수업 금지는 학부모를 더욱 불안에 떨게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원영 중앙대 명예교수(유아교육학)는 “공교육에서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제공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우리나라는 입시와 일자리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다른 아이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심하다. 학부모들에게 일찍 유치원부터 영어를 시키려는 교육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입시 위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학부모들의 불안과 교육열에 대해 정부의 더 감수성 어린 접근을 했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정부가 말하는 ‘놀이교육’의 구체성이 부족한 점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입니다. 임재택 부산대 명예교수(유아교육과)는 “이번 혁신방안에 ‘놀이 중심’, ‘아이 중심’이란 표현은 썼지만 실제 유치원 수업이 어떻게 바뀌는지 체감할 수 있게 구체화된 것은 없다. 국민들에게 와닿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이 같은 한계와 함께 교육부가 공론화 과정 없이 올 3월부터 바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영어수업을 금지하기 위한 검토에 들어간 것이 논란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나정 동국대 교수는 “선행학습금지법이 2014년에 제정됐지만 3년 뒤인 올 3월부터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수업에서 영어가 금지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작년부터 미리미리 알리고,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도 영어를 금지하는 게 어떨지 정부가 운을 먼저 띄웠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나 교수는 “교육부가 현장의 학부모 의견을 좀더 들어본 뒤 시행을 계획했었야 하는데 영어수업 금지를 성급히 시행하려고 했던 점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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