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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김남희의 앉아서 하는 여행, 몸으로 읽는 책] (22)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든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자유, 또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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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와 ‘안나 카레니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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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체온계는 여전히 39도를 가리킨다. B형 독감에 걸려 앓아누운 나를 향해 마감은 후퇴를 모르는 군인처럼 전진해오고 있다. 나는 책상에 놓인 세 권짜리 두꺼운 소설을 적이라도 되는 듯 노려본다. 하필 내가 고른 책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대로 불행하다.” 이 소설은 2007년, 영미권 현역 작가 125명이 꼽은 ‘최고의 문학 작품’에 오르기도 했다. 이쯤이면 짐작이 갈 것이다. 독감으로 혼미한 내가 씨름해야 하는 책이 <안나 카레니나>임을. 러시아와 톨스토이라니.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를 약속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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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의 러시아 여행에서도 나는 이런 막막한 기분에 빠져있었다. 그 여행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나의 무지뿐이었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대로에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주변에도 루미나리에가 반짝거렸다. 거리는 넓고 깨끗했고, 건물은 크고 웅장했다. 내가 상상했던 ‘소련’ 시절의 우중충한 러시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하잖아, 이건?”이라고 중얼거린 것은 국립 레닌도서관에서였다. 국립 도서관의 격조와 우아함 때문이었다. 열람실 책상과 의자는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웠고 세월에 부드럽게 닳은 나무 계단과 대리석 기둥은 조화로웠으며 잘 자란 초록 식물이 군데군데 놓인 서가는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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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10세기 무렵에 동방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유가 예배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는 글이 기억났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거의 종교적일 정도로 열렬했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역도 그랬다. 지하철역이 그토록 미학적이면서도 역사적 의미로 가득한 공간이 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역마다 테마를 정해-10월 혁명, 러시아 연방 소개, 계절에 따른 농사, 지역별 풍습, 소비에트의 24시간 등-조각과 회화,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예술적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다. 두 개의 역명은 지하철 건설 노동자로 일했던 청년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궁전과 교회들도 내가 본 적 없는 화려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선전도구가 되어버린 공산주의 시절의 예술 작품과 마주칠 때를 제외하면 러시아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예술적 성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러시아에 매료될 이유는 많았다. 읽을 수 없는 문자에 현혹되는 내 호기심, 거리감 없는 다정한 사람들보다는 가까워지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자기 영역이 확실한 사람들)에게 끌리는 내 성향.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이종교배 문화에 대한 본능적인 호감. 이런 취향에 러시아는 맞아떨어졌다. 키릴문자는 내가 읽을 수 없었고, 사람들은 무례하게 느껴질 만큼 딱딱한 언동 속에 가끔씩 희미하게 친절의 온기를 전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7700㎞에 이르는 동서 거리가 만드는 다층적인 문화가 있었고, 기독교이지만 가톨릭과는 다른 동방정교를 믿는 나라인 데다가 봉건주의에서 공산주의를 거쳐 자본주의로 넘어온 다이내믹한 과정이 있었다. 엄청난 사치를 누리던 귀족사회와 황제를 처형한 후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를 일군 곳이었다. 지구에서 달로 우주선을 쏘아 보낸 첫 나라였다. 사치든 향락이든 혁명이든 갈 수 있는 극한의 막다른 곳까지 갔던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책 좀 읽었다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흠모하는 무수한 작가들을 배출한 땅이라는 프리미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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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배출만 한 게 아니라 그들은 온 나라에 그들을 기리는 흔적들을 만들어놓았다. 작가들의 이름을 딴 거리와 카페와 박물관, 생가와 기념관이 넘쳤다. 러시아에서 돌아왔지만 나의 러시아 여행은 이제야 시작된 것 같았다. 러시아 미술사에 관한 책들을 사들이고, 러시아 작가들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으니. 그 와중에 책장에 꽂혀만 있던 <안나 카레니나>를 꺼낸 터였다. 이 책에는 세 쌍의 커플이 나온다. 불륜을 아내에게 들키는 바람에 체면을 잔뜩 구겼지만 들킨 게 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남편 스티바와 그런 남편을 혐오하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같이 살 수밖에 없는 돌리. 평범한 부부를 대표하는 커플이다. 제목이 된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 나는 브론스키의 자유분방함이 안나의 의심이나 불안보다 더 거슬렸다. 키티에게 한창 작업을 걸다가 안나와 마주친 순간 사랑에 빠지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나 고뇌도 없이 그저 욕망을 따라가는 철부지로 보였다.

안나는 명예와 재산, 아름다움, 남편과 아들까지 가진 귀족 여인이었지만 사랑 없이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여인이다. 그 믿음으로 용감하게 선택한 사랑은 주변의 냉대와 멸시 속에 파국을 맞는다. 마지막 커플인 키티와 레빈.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이라고 할 만큼 톨스토이의 고뇌와 사상을 집약한 인물이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하고 비사교적이며 극단적으로 낙관과 비관을 오간다. 안나와 더불어 주인공이라 할 만큼 비중이 큰데 매력적인 남자는 아니다. 장점이 있다면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고뇌를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 집요함이랄까. 하지만 세 커플 중 관계를 통해 성장해가는 커플은 이들뿐이다. 레빈도 그의 아내 키티도 사랑을 하며 조금 더 용감해지고, 조금 더 넓어진다.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며 선하게 살아가는 것 외에 삶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보여준다.

보답 받지 못한 안나의 비극적인 사랑이 내 마음을 흔든 건 그녀가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달려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간 사람들, 그래서 파멸하고 만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를 매혹한다. 러시아 민중들이 그러했듯이 안나 또한 길 끝에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막다른 곳까지 달려갔다.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맹렬히 타오르던 모든 것들은 꺼지고 만다는 사실을. 열정이 사그라진 후에는 불길이 타고 남은 자리의 황폐한 적막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눈멀고 귀가 먼 상태에서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다. 한순간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믿었던 그 자리로 결국엔 다시 돌아오고 마는 끝이든, 전에 사랑하던 모든 것들이 참혹하게 부서지고 사라지는 끝이든, 운 좋게 그 어느 쪽도 아닌, 다시 몸을 일으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정도의 힘이 남은 그런 끝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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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주는 찰나의 달콤함도, 그보다 오래 남는 이별의 씁쓰레함도 맛보았고, 끝에 선 자의 막막한 절망도 내 것으로 해본 이들이라면 안나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지 않을까. 끝을 알지만 멈출 수 없어 달려가는 순간에야 드러나는 자신 안의 낯선 얼굴을 우리는 모두 마주한 적이 있다. 우리의 삶 또한 죽음이라는 결말을 알면서도 달려가는 기차에 다름 아니기에. 인생의 레일 위에 서 있는 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단지 조금 덜 외로운 죽음과 조금 더 편안한 죽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끝을 알면서도 감당한다는 것이 결국 성장의 증거다. 브론스키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기차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안나는 자신을 살게 하는 사랑을 찾아 끝의 끝까지 달려갔다. 윤리적으로 올바르지만 죽은 것 같은 결혼의 삶과 부도덕하지만 살아 있는 것같이 사는 불륜의 삶이 부딪칠 때 그녀는 거짓과 기만을 혐오하며 사랑으로 뛰어들고 마침내는 스스로를 벌했다.

내 삶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해도 나는 지금의 삶을 살겠다고 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인생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실은 삶의 길목 어딘가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냉혹한 진실뿐인데도 우리는 삶을 감당한다. 여행의 끝은 결국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나는 늘 다시 떠난다.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친 후에야 겨우 성장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여전히 떠날 수 있는 것일까. 한 번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집은 조금 더 아늑해지고 일상은 더 애틋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은 조금씩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이후 죽음은 내게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렇게 떠돌다가는 객사 혹은 고독사가 운명’이라는 농담에 30대의 나는 깔깔 웃어 넘겼지만 쉰을 앞둔 나는 담담히 미소 짓는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온다. 기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레일에 부딪치는 바퀴 소리도 점점 높아진다. 내 시야를 가로막을 정도로 커진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와 내게 묻는다. 너는 끝내 지금껏 살아온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나는 끝까지 나 자신으로만 남고 싶다고, 거짓과 기만의 가면을 쓰지 않는 나를 관철하겠다고 레일 위에 버티고 서 있다.

<김남희 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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