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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박수찬의 軍] “사제보다 군용이 좋다”…‘잇템’ 대접받는 PX 상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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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육군 모 부대에 설치된 PX에서 부대 개방행사에 참석한 군인 가족들이 쇼핑을 하고 있다.


군복무를 경험한 30대 이상의 남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군용보다 사제(私製)가 낫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이 있다.

똑같은 장갑인데도 군용 장갑을 끼면 손가락 끝이 시리거나 찢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부대 밖에서 구입한 장갑은 따뜻하고 질기다. 위장크림도 부대에서 지급한 것을 쓰면 잘 지워지지도 않고 피부 트러블도 발생하지만 사제 위장크림은 그렇지 않다. 군용 건빵에는 병사들이 엉뚱한 생각을 못하게 하는 성분이 있다는 인식이 퍼져 건빵 대신 초코파이를 먹었고, 군납 담배는 맛이 없다고 생각해 휴가 복귀하는 부대원이 가방 속에 담배를 넣어 몰래 반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미 연합훈련이 열리면 미군 전투식량(MRE)을 얻기 위해 미군 장병들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주한미군 부대에서 밀반출된 미군 군복은 고급 제품으로 인식돼 인기를 얻은 반면 우리 군이 쓰던 군용품은 작업복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같은 인식은 최근 크게 변하고 있다. 군대 충성마트(PX)내에서 판매하는 군용품이 싸고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기가 치솟고 있다. 여기에 ‘군대에서만 쓰이는 제품’이라는 희소성이 더해지면서 인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등 군인을 지인으로 둔 사람들이 군용품을 대리 구입하면서 인기품목들은 재고가 금방 소진되는 진풍경도 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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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X에서 판매되고 있는 남성 속옷들. 시중 가격의 3분의 1 가격이면서 품질도 좋아 인기를 얻고 있다.


◆군내 내의와 핫팩, 화장품까지 인기

주부 A씨는 최근 지인을 통해 PX에서 판매하는 겨울 내의를 구했다. 가격이 1만6000원인 이 내의는 국내 유명 스포츠 브랜드에서 제작한 제품으로 시중에서 이와 비슷한 제품이 3~4배 이상 비싸게 판매된다. 원단은 상당히 부드러웠고 디자인은 심플했다. 보온성과 착용감도 좋았다. 그래서 “내의를 몇 벌 더 구해달라”고 지인에게 다시 부탁했다.

영하 17도를 넘나드는 혹한이 찾아오면서 군대 PX에서 판매하는 겨울용품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가격이 최대 3분의 1 이상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겨울용품은 핫팩이다. 핫팩은 추운 겨울에 손을 따뜻하게 해주는 손난로다. 개봉하면 공기와의 접촉으로 인해 열이 발생한다. 크기가 작고 쉽게 열을 얻을 수 있어 군대에서도 겨울철 경계작전을 비롯한 야외활동 시 필수품으로 여겨진다. 특히 혹한기 훈련 기간에는 잠들기 전 차가운 침낭에 핫팩을 여러 개 넣어 냉기(冷氣)를 없앤다. 겨울에 핫팩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PX에서도 겨울에는 충분한 재고량을 유지하고 있어 구하기가 쉽다. 편의점에서 파는 핫팩에 비해 열이 더 많이 방출되고 효과도 더 오래 지속되는 등 품질도 좋다. 때문에 겨울이면 여자친구 등 부대 밖 지인들의 부탁을 받아 핫팩을 대량 구매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내의도 PX 판매용품 가운데 인기가 높다. 옛날 군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살색 내의는 무거우면서도 보온성이 떨어져 부대 밖 상점에서 파는 사제 내의를 입은 장병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PX에서 판매되는 내의는 퓨마, 네파 등 유명 브랜드에서 제작한 것으로 착용감과 보온성이 뛰어나다. 가격도 시중 가격의 4분의 1 수준이라 부담도 크지 않다. 겨울철 휴가를 받아 귀향하거나 부대 개방 행사 때 부모를 만나는 장병들은 선물용으로 PX에서 내의를 구입하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PX에 내의가 들어오면 금방 팔려나간다. 드로즈 팬티나 기능성 양말 등도 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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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X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는 달팽이크림.


화장품은 PX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피부 미용에 신경을 쓰는 젊은 장병들이 늘어나면서 스킨, 로션 같은 기초 화장품 외에도 선크림, 클렌징 오일, 팩 등도 PX에서 정가의 최대 4분의 1 값에 팔리고 있다. 여기에 여군 1만명 시대를 맞아 여군들을 겨냥한 수분크림, 아이크림 등 여성용 기능성 화장품도 등장했다. 화장품을 찾는 장병들이 많아지자 PX에서는 화장품 코너를 따로 만드는 한편 부대 개방행사나 휴가철 귀향 때 선물용으로 쓸 수 있는 화장품 세트를 판매하고 있다.

PX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장품은 달팽이크림이다. 포털에서 검색하면 ‘PX 달팽이크림’ ‘군대 달팽이크림’이 연관 검색어로 등장할 정도다. 달팽이 크림은 달팽이의 점액이 함유된 크림으로 피부 재생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당 5만원 이상인 달팽이 크림을 PX에서는 5000~8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비싼 화장품을 필요한 만큼 구매하기 어려운 20대 여대생과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구입 개수 제한도 없어서 장병들이 선물용으로 대량구매하기도 한다. 군 관계자는 “PX에서 달팽이 크림을 10여개씩 사가는 병사들을 종종 본 적이 있다”며 “전역한 군 선배들이 ‘달팽이 크림 하나만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정가보다 최대 75%까지 싼 가격에 PX에 납품하는 업체들은 마케팅 측면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다. 2년 동안 군복무를 하면서 자신이 소비했던 상품의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면 전역 후에도 해당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는 좋게 각인된다. 여기에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제품 입소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부대 개방행사를 통해 PX를 방문하는 군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 효과는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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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X 판매대에 쌓여있는 제품들. 과거와 달리 품질 수준이 높고 가격은 낮아 장병들과 그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장병 사기 증진과 군 신뢰도 증진 효과

오래 전부터 군에서 민간으로 흘러나오는 상품들은 우리나라의 생활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주한미군이 들여온 서양식 문화는 군의 특성이 민간 생활상에 영향을 미치는 첫 번째 계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먹는 부대찌개(Army stew)다. 군인들이 먹었던 식단처럼 보이지만 미군부대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먹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6.25 전쟁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50년대, 주한미군 부대에서는 소시지와 통조림 스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신선한 고기를 구하기 어려웠던 그 당시에 소시지와 스팸은 미국의 발전상을 증명하는 상징이자 귀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고기로 만들었지만 고기 같지는 않고,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소시지와 스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맛이 느끼해 그대로 먹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김치와 고추장, 육수 등을 넣어 얼큰하게 끓여먹었다. 이것이 바로 부대찌개의 시초다. 이후 수십년 동안 주한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맥주와 위스키, 갈비, 전투식량 등은 고급 제품으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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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는 미군을 통해 들어온 미국 남부 지역 파이가 기원이다. 병사들의 중요한 간식거리이자 북한에도 전해진 명물로 자리잡았다.


초코파이도 시초는 미군에서 비롯됐다. AP 통신에 따르면, 초코파이의 원조인 미국의 문파이(Moon pie)는 통밀 크래커에 마시멜로를 끼우고 초콜릿으로 코팅을 했다. 1917년 미국 남부 테네시주 채터누가시에서 처음 만들어져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납품됐다. 미국 남부 지역 출신 병사들은 미군에 남부식 식습관을 전했고, 주한미군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초코파이로 재탄생했다. 우리 군 병사들이 간식으로 먹던 초코파이는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에 전해져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반면 우리 군에서 사용되는 제품이나 식단 등은 민간에서 각광받지 못했다. 군에서 지급되는 전투화는 자칫하면 발에 물집이나 무좀이 발생하고 굽이 잘 떨어지는 등 품질이 좋지 않고 불편하다는 인식이 많았다. 군 간부들도 동기들끼리 돈을 모아 사제 전투화를 구입하곤 했다. 건빵은 민간에서 호기심의 대상일 뿐, 즐겨먹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전투복을 입는 것이 당연시됐다. PX에서 판매하는 상품 중 인기 있는 것은 맥주나 위스키 같은 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군 보급품의 질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면서 군 당국은 장병들에게 보급되는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옛날과는 달라진 장병들의 기호를 맞추려는 시도도 계속되는 중이다. 민간 업체들도 PX에 싸고 질 좋은 제품을 납품해 장병들의 기호를 충족하면서 군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 효과와 대(對)군 이미지 개선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나폴레옹은 “반(反)혁명적 발상”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병들이 착용하는 군복을 화려하게 꾸미고 질을 높이는 작업을 진해 군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반면 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독일이 만든 무장조직 ‘국민돌격대’는 군복조차 지급받지 못한 대원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은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군인들이 쓰는 물건의 질을 높이는 것은 장병 사기와 전투력 증진은 물론 민간에서 군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역할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PX 제품에 대한 인기가 지속된다면 군 안팎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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