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이택희의 맛따라기] 제철 해산물에 강남서 8000원짜리 점심 반찬이 8가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푸짐하고 진한 맛 자연산 계절 해산물 요리…’남도사계 고운님’
중앙일보

‘남도사계 고운님’은 계절마다 서남해안의 제철 해산물을 산지에서 직접 조달해 남도 미각의 푸짐한 밑반찬과 함께 여러 가지 음식으로 만들어낸다. 이른 봄 메뉴로 내고있는 새조개 샤부샤부 접시.싱싱한 조개 살의 맛을 해치지 않으려고 곁들이는 채소는 향이 적은 것들로 구성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남도 한식이라 할까, 세련미를 더한 남도 주안상이라 할까. 10년을 다녔지만 갈 때마다 음식이 입에 붙는다. 대치동 포스코센터 뒤에 있는 ‘남도사계 고운님(서울 강남구 삼성로81길 22 한정빌딩 1층/전화 02-562-9292)’. 구구한 설명은 군더더기다. 맛을 낼 줄 아는 집이다. 음식이 꾸밈없이 맛있다.

중앙일보

‘남도사계 고운님’ 본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파란만장하게 산 주인이 낸 꾸밈없는 맛

음식보다 심금을 더 울리는 건 주인 정춘근(59)씨의 파란만장한, 그러나 좌절을 모르는 인생 역정이다. 드라마를 쓴다 해도 그렇게 얘기를 지어낼 수는 없겠다. 그가 살아낸 스토리는 대한민국 현대 생활사의 한 전형이다. 당대의 전모를 꿰뚫어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히스토리(역사)다.

지난 주말(10일) 저녁 그와 4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셋이 40도 테킬라 1L짜리 한 병을 비웠다. 그를 10년간 알고 지냈고, 함께 여행도 했으며, 1년에 두세 차례는 그 집 음식을 먹었지만, 구절양장(九折羊腸) 살아온 얘기와 음식에 관한 생각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듣기는 처음이다.

‘고운님’은 점심에는 요일 메뉴로 식사를 하고, 저녁엔 주안상 개념의 해산물 일품요리를 한다.

요일 메뉴(8000원)에는 8가지 반찬과 요일 국(찌개)에 밥이 나간다. 메뉴는 4개월마다 2~3가지를 교체하고 요일별 순서를 바꿔 변화를 준다. 여름에는 무가 맛이 없고 비지가 잘 상하기 때문에 황태 뭇국 대신 건새우 감잣국, 콩비지 찌개 대신 애호박 고추장찌개를 넣는 식이다. 요즘 차림은 ▷월-시골 김치찌개 ▷화-황태 뭇국 ▷수-콩비지 찌개 ▷목-된장·청국장찌개 ▷금-육개장 ▷토-묵은지 김칫국이다.

중앙일보

‘고운님’의 요일 메뉴 중 토요일의 묵은지 김칫국 상차림. 반찬이 8가지 올라온다. 요일 메뉴 내용은 1년에 3차례 개편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강남서 8000원짜리 점심 반찬이 8가지

지난 10일 밥상에는 반찬으로 미나리나물·숙주나물·잡채·멸치볶음·배추겉절이·깍두기·파래김·젓갈이 올라왔다. 맛으로 이름값 하는 반찬들이다. 요일 메뉴는 국(찌개)을 한 솥 끓여 놓고 그게 다 팔리면 끝난다. 꾸준히 인기 있는 메뉴는 시골 김치찌개, 같은 요일에 하는 된장·청국장찌개다.

중앙일보

미나리무침. ‘고운님’은 이른 봄이면 청색 채소로 섬초(시금치)와 미나리를 쓴다. 미나리는 전남 나주시 노안의 키 작은 미나리(‘돌미나리’라 통칭)만 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숙주·미나리나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잡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잔멸치볶음. 멸치는 고향인 완도 산을 많이 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배추겉절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깍두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양념하지 않고 구운 파래김. 완도에서 자란 주인 정씨의 어린 시절은 ‘김 작업’으로 점철돼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낙지젓갈무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저녁 주안상에 쓰는 해산물은 제철 자연산만 쓰고, 산지 중매인들과 직거래해 조달한다. 사계절 철 따라 ▷봄에는 여수 새조개, 부안 주꾸미, 완도 갑오징어, 고흥 도다리 ▷여름에는 신안 임자도 민어, 신안 지도 병어, 여수 갯장어(하모) ▷가을에는 보성 전어, 무안 낙지, 완도 참소라 ▷겨울에는 완도 석화 생굴, 벌교 참꼬막, 완도 간자미를 상에 올린다.

사철 내는 해산물 음식은 ▷완도 매생잇국 ▷여수 서대 찜·무침 ▷진도 간장게장 ▷완도 전복 ▷영광 보리굴비찜 ▷우럭 찜·젓국 ▷흑산도 홍어삼합 ▷완도 아나고구이 등이 있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음식은 병어 회·조림과 갑오징어 데침·무침이다.

사계절 제철 자연산 해산물 산지 직거래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요즘 상에 오르는 메뉴는 ▷신안 지도 병어 회·초무침(각 6만원)·조림(6만3000원/8만7000원) ▷완도·서산 갑오징어 데침·볶음·물회·초무침(각 4만8000원) ▷주꾸미 데침·초무침·연포탕·볶음(각 5만5000원) ▷벌교 참꼬막 데침(3만8000원)·무침(4만8000원) ▷무안 낙지 회·초무침·데침·연포탕·탕탕이(각 5만5000원) ▷여수 새조개 초무침·샤부샤부(각 15만8000원) ▷목포 생조기 매운탕(1인 1만3000원) ▷목포·제주 갈칫국(1인분 1만8000원) 등이다.

일품요리는 대략 4인분 기준이다. 한 가지로 배부를 수는 없지만 안주로는 넉넉하다. 홍어·민어·새조개 말고는 1인 5만원이면 모자라지 않게 먹을 수 있다. 음식값이 조금 세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반찬들을 참작하면 비싼 게 아니다. 반찬도 안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날도 여기저기서 “반찬 좀 더 주세요” 소리가 들렸다. 주인 정씨는 “어떤 손님은 ‘어머니의 맛’이라며 주문한 안주보다 반찬을 더 먹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주인이 보기에는 밉겠지만 나도 그런 부류다.

중앙일보

‘고운님’ 저녁의 기본 상차림. 점심의 8가지 반찬 중 4가지는 바꾸고 3가지 쌈에 시골된장이 나온다. 저녁에 새로 나온 반찬은 고구마잎줄기나물·토란대나물·톳된장무침·갓나박물김치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쌈된장. 전남 곡성군 옥과면 수리의 김광신 할머니가 담가준 된장에 삶은 메주콩을 넣고 치대 염도를 낮춘 후 2차 숙성한 된장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안주로 새조개 샤부샤부와 갑오징어 데침을 먹었다. 저녁에는 반찬 8가지에 시골 된장을 곁들인 3가지 쌈(봄동·배춧속·깻잎)이 나왔다. 8찬 내용도 점심상에서 4가지를 바꿔, 고구마잎줄기나물·토란대나물·톳된장무침·갓나박물김치·미나리나물·숙주나물·배추겉절이·파래김이 나왔다.

중앙일보

고구마잎줄기나물. ‘고운님’에서 직접 건조해서 쓴다. 흔히 ‘고구마줄기’ 또는 ‘고구마순’이라고 하지만 저 나물의 정확한 부위는 고구마 줄기에 붙어 자란 잎자루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토란대나물. 토란대는 된장을 담가주는 김광신 할머니가 말려 보낸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톳나물무침은 된장으로 간을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갓나박물김치. 붉은 갓으로 색을 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주인 "아무 양념 없이 그냥 먹어보라" 권해

새조개 샤부샤부에는 싱싱해 새 부리 모양이 살아있는 새조개 살과 느타리버섯·섬초(시금치)·배춧속대가 커다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주인 정씨는 새조개 내장 부분을 잘라내고 갈색 날개 부분만 아무것도 찍지 말고 생으로 먹어보라 했다. 부드럽게 씹히는 게 달면서 감칠맛이 진했다. 싱싱한 해물이 내는 맛이다. 사람들이 비싸도 찾는 이유를 알겠다.

중앙일보

새조개를 양념하지 않고 먹어 보라며 내장 부분을 잘라 권하는 ‘고운님’ 주인 정춘근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새조개 살을 기름소금에 찍는 모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초고추장에 뉘어놓은 새조개 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엔 기름소금에 찍어 먹으라 했다. 고소한 맛은 더하지만 단맛이 묻혔다. 육수에 데친 다음에도 그냥 먹고, 기름소금·초고추장 순서로 찍어 먹으라 권했다. 그런 다음 입맛대로 먹으면 된다. 살은 날개부터 내장 부분까지 씹히는 질감이 달라 새조개 한 마리에서 여러 가지 식감이 났다.

중앙일보

새조개 살을 끓는 국물에 데치려고 넣는 주인 정춘근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먹기 좋게 데쳐진 새조개 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익은 새조개 살(왼쪽)과 익지 않은 것. 익어도 크기나 모양이 많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새조개 샤부샤부에 들어간 재료를 모아 놓으면 사합이 된다. 섬초(시금치)·느타리버섯·배추속대·새조개 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새조개를 익혀 먹던 국물에 살아있는 굵은 주꾸미 2마리를 데쳤다. 요즘 주꾸미는 알이 든 놈도 가끔 있지만 아직은 철이 이르다. 산란을 준비하느라 살이 토실토실 올랐고, 싱싱해서 다리는 묵직한 쫄깃함이 있었다.

중앙일보

주꾸미데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갑오징어 데침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깻잎 2장을 접시에 깔고, 다리를 가닥을 봉긋하게 쌓은 뒤 몸통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그 위에 가지런히 덮었다. 접시 한쪽에는 딱 제철인 봄 미나리 무침을 소복하게 담아놨다. 살의 두께가 먼저 눈길을 잡았다. 하도 두툼해 이게 갑오징어 맞나 싶었다. 이번에도 먹는 순서를 안내했다. 그냥, 기름소금에, 미나리무침에, 초고추장에 먹어보라 했다. 두꺼운 갑오징어 살이 부드럽게 씹히면서 바다의 윤택한 시원함을 푸짐하게 쏟아냈다.

중앙일보

갑오징어 데침. 살의 두께가 품질을 알려준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갑오징어는 5월에 완도·목포·서산에서 살이 차고 맛이 가장 좋은, 한 마리에 800g~1㎏ 크기를 구매해 급랭해두고 1년 내 쓴다. 그 노고를 아는 사람은 알아서 지난해 8월에는 tvN ‘수요미식회’에 갑오징어 잘하는 집으로 소개됐다.

"맛의 근본은 어머니의 전라도 토속음식"

식재료 조달은 정씨가 다 한다. 산지와 직거래하고 시장에도 나간다. 욕심이 워낙 많아 사두고 썩어서 버리는 것도 많다. 경기도 하남에 있는 높이 2.2m 되는 냉동실 9.9㎡(3평), 냉장실 6.6㎡(2평) 규모의 저온창고가 늘 가득 차 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담당하는 찬모(58세)는 강원도 화천 출신이지만 18세에 영광군 홍농읍으로 시집와 전라도에서 15년쯤 살았다. 반찬은 그이가 하지만 레시피는 주인이 만들었고, 잔소리해가면서 관리한다.

그는 “어머니가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도 토속 전라도 음식을 잘했다. 그때 먹어본 미각으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밑반찬에 남달리 신경을 쓴다. 추억의 맛, 그리운 어머니의 맛을 살려내려고 애쓴다. 기억을 살려 그 맛이 나올 때까지 만들어 보면서 기본적으로 돌아가는 반찬 레시피를 하나씩 만들었다. 뜻대로 안 되면 주방에 들어가서 직접 조리한다. 속도는 느리지만 만들기는 제대로 한다. 입맛·눈썰미·손재주는 타고난 듯하다”고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 겁나서 취급 안 해"

음식에 대한 고집도 있다. 손님들이 겨울에는 과메기를 많이 찾는다.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그는 하지 않는다. “자라면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다. 서울 와서 알게 됐다. 예전부터 접하지 않은 음식은 자신이 없어서, 겁나서 못 판다”고 이유를 설명한 그는 “음식은 뭐든지 입에 가득 물고, 마음 놓고 먹어야 맛이 난다”고 했다.

‘고운님’ 본점은 100㎡가 약간 안 되는 넓이에 좌석은 64석이다.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바로 잡기는 어렵다. 매일 문 여는 시간은 오전 11시~ 오후 10시. 휴일은 없고 명절만 쉰다.

여기 말고도 그는 2곳에 음식점을 더 운영한다. ▷고운님 삼성역점(서울 강남구 영동대로86길 11/전화 02-403-8282). 음식은 전반적으로 본점과 같지만 점심에는 단품 식사가 되고 저녁에는 주안상(1인 3만5000원/6만8000원/7만8000원) 코스를 주로 한다. ▷정(正)선생국(國)밥(서울 강동구 고덕로 52 대원아파트 상가/전화 02-449-3388)에서는 돼지국밥(6800원)과 해물국밥·소갈비우거지국밥(각 7900원)을 판다. 광주에서 잘 나가다가 빈털터리가 된 주인이 서울로 올라와 재기할 때 국밥으로 시작한 만큼 국밥에 애정을 쏟는다. 그래서 암사동에서 시내로 옮길 계획을 하고 있다.

중앙일보

‘남도사계 고운님’ 삼성역점의 주안상 기본 상차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정선생국밥’의 해물국밥 상차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6세에 호프집으로 시작한 외식업 33년

광주에서 일궜던 모든 걸 잃고 서울로 올 무렵 그는 광주의 작은 절에 다녔다. 스님이 사주팔자에 오행 중 부족한 기운이 있는데 상호를 ‘고운님’으로 하면 보완이 된다고 지어줬다. 원래는 ‘고은님’으로 할 생각이었다.

광주에서 1985년 호프집을 시작하면서 외식업에 첫발을 디뎠다. ‘열창’이라는 가라오케(‘빈[空] 오케스트라’를 합성한 일본말로 노래방 초창기의 아날로그 스타일 반주 시스템)도 겸업했다. 만학으로 1986년 들어간 대학을 졸업할 때(1990년)까지 계속했다. 생고기 집 ‘한국관’을 하던 지인이 음식점을 확장하면서 자금과 폭넓은 인맥으로 도와 달라며 동업을 제안해 업종을 바꿨다. 음식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3년 동안 장사는 잘했지만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의 빚보증을 선 게 사달이 났다. 1997년 3월 부도가 났다.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빚에 쫓기다가 실형까지 살면서 끝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재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담양 창평국밥 만드는 걸 배워 서울로 왔다.

빚보증으로 다 날리고 국밥 집 차려 재기

인맥이 넓은 데다, 본인이 잘못해서 부도가 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1999년 6월 동서울터미널에 ‘고운님’ 상호로 창평국밥 전문점을 차렸다. 낮에는 배달도 하면서 손톱이 몇 번이나 빠질 정도로 열심히 국밥을 팔았다. 저녁에는 남도 음식을 술안주로 냈다. 손님들이 “이 좋은 솜씨를 가지고 왜 여기서 국밥을 파느냐. 강남으로 진출해 봐라”고 권유했다.

어려움이 그를 더 단단하게 단련했을까. “지난 세월의 경험과 배움은 쓸데없는 게 없더라. 10대에는 혼자 끼니를 끓이는 날이 많았다. 자라서는 여러 가지 음식점을 해보면서는 요리의 절차와 규칙을 몸으로 익혔다. ‘근대공예사’에서 일할 때 까다로운 주인에게 배운 규격·색깔에 대한 세밀한 감각은 음식에 적용해도 틀리지 않더라”고 했다.

중앙일보

‘고운님’ 벽에 붙인 메뉴 안내. 또래들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기에 간판 집에서 일을 한 주인 정씨가 그때 배운 감각으로 디자인했다. 그는 ’배워 두면 언젠가는 쓰임새가 있다“고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02년 논현동 116번지에 국밥집 분점 개념으로 남도음식점 ‘고운님’을 냈다. 식사보다 안주에 비중을 뒀고, ‘암뽕순대’도 했지만 해산물을 주로 했다. 음식이 요즘과 방향은 비슷했지만 수준은 좀 낮았다. 전라도 시골 음식을 내는 선술집 분위기였다. 방바닥에 앉아서 먹는 주안상에 인테리어는 주막집처럼 연출했다. 주인이 친절하고 열심히 하니 금방 소문이 났다. (※인터넷에서 ‘논현동 고운님’을 검색하면 지금도 블로그 포스팅이 남아 있다.)

'고운님' 상호가 유흥주점 오해 불러 수정

한번은 어떤 여성이 전화를 해서 뭐하는 집이냐고 물었다. 남도음식점이라고 했더니 알았다며 끊었다. 아마 남편 주머니에서 ‘논현동 고운님’이 발행한 카드 영수증이 나온 눈치였다. 상호가 의심스러워 확인하려고 전화를 한 듯했다. 괜한 오해를 없애려고 상호를 ‘우리주막 고운님’으로 바꿨다. 강남 진출 6개월 만이다.

1년 반 동안 양쪽을 운영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동서울터미널 국밥 집은 여동생에게 주고 강남에 전념했다. 2007년까지 만 5년을 운영하다가 대치동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옮기면서 음식을 전면 개편하고 수준을 높였다. 제철 자연산 해산물만 취급하면서 계절음식과 사철 먹는 음식으로 이원화해 메뉴를 편성했다. 점심 요일 메뉴도 도입했다. 제철 해산물을 강조하기 위해 상호를 ‘남도사계 고운님’으로 바꿨다.

중앙일보

갑오징어무침. 이른 봄 ‘고운님’ 음식에는 전남 나주시 노안에서 나는 키 작은 미나리가 많이 들어간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1959년 전남 완도군 고금면 이덕암리(古今面 二德巖里)에서 태어났다. 섬이지만 아버지는 4남 4녀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고, 어머니는 친정이 강진 마량장터에서 포목점을 했다. 당시로써는 유복한 살림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폐결핵을 앓던 아버지는 5년 뒤 어머니와 3형제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병시중에 매달려 살던 어머니는 세 살 먹은 그를 할머니가 계신 완도 큰집에 맡겼다. 초등학교 졸업 이듬해까지 큰집에서 살았다.

세 살에 어머니 떨어져 큰집 할머니에게

당시 농어촌에서는 제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일손을 거들어야 하던 시절이다. 큰집에서 김 일을 많이 했다. 바다에서 훑어온 김에서 파래와 매생이를 가려내는 일이었다. 김에 다른 게 섞이면 등급이 떨어졌다. 전기도 없을 때라 ‘호야 등불(남포등)’ 켜고 꼬챙이 두 개를 들고 눈이 따가운 밤까지 일했다. 일본수출품(당시 ‘조합품’이라 함) 김은 품질관리가 가장 엄격했다. 김을 두껍게 뜨고, 구멍이 있으면 안 되고, 반짝이는 검은 색이 나야 합격품이 됐다.

수심 깊은 양식장에서 포자를 받아 키운 김이 품질이 좋았다. 동네 공유해역에서 좋은 김을 생산할 수 있는 양식장은 식구가 많은 집에 우선 배정했다. 주민들 살림이 오로지 김에 매여있었다. 온 식구가 그 일에 매달렸다. 그는 매생잇국을 팔지만 “지금도 매생이가 웬수 같다”고 했다.

중앙일보

매생잇국. 어려서 김과 매생이 고르는 일을 지긋지긋하게 해 그는 지금도 ’매생이가 웬수 같다“ 고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시절엔 일곱 살 아이가 젖먹이 동생을 업고 보살피는 게 예사였다. 큰집에서 산 11년 세월이 소년에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설상가상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따뜻한 정이 늘 그리웠다.

홀로 된 어머니는 처음엔 외할머니가 하던 강진 마량장터 포목점 ‘화신상회’ 일을 도왔다. 바닷가에 농토도 좀 있고 장사도 하던 외가는 넉넉한 편이었다. 포목점은 마량의 붙박이 점포와 주변 오일장을 도는 노전을 겸했다. 그 포목점도 잘 안 돼 오래잖아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광주로 가서 김·멸치 같은 완도 해산물을 받아다가 머리에 이고 집집이 돌며 파는 보따리장수를 시작했다.

열다섯 살 때 홀어머니 사는 광주 집에 가

친구들이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그는 광주의 어머니에게 갔다. 어머니 살림은 어려웠다. 형이 돈도 벌면서 학교에 갈 수 있다며 BBS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곳은 불우한 10대들이 모여 군대 생활관처럼 살면서 엄격한 규율 속에서 낮에는 구두닦이를 했다. 경험이 없는 그는 닦을 구두를 수거해오는 ‘찍새’를 했다. 낮에 일하면 야간 중학교라도 다닐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집을 두고 못 가는 설움은 견디기 어려웠다. 1년을 못 채우고 도망 나왔다. 어려워도 집에서 가족과 살고 싶었다.

BBS(Big Brothers and Sisters) 운동은 본래 ‘문제아동 교화는 형이요 누나인 청년 남녀 손으로’라는 깃발 아래 1904년 뉴욕에서 시작된 청소년 선도운동이다. 우리나라에 1964년 도입됐다.

중앙일보

병어회. 병어는 ‘고운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선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주꾸미 데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형은 아버지 대신이었다. 42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건강할 때는 광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싸움꾼이었다. 작은 키에 아주 독한 싸움꾼이었다. 어머니는 “너까정 형 닮아가면은 나는 디져빌란다”고 단속했다. 그 말을 듣고 ‘깨갱’ 했다. 무조건 어머니 말을 따르기로 했다. 어려서 10년 넘게 어머니와 떨어져 산 그는 “가족이라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었다.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은 것도 어머니 덕택이다.

또래들 중학생일 때 간판 집 취직 돈벌이

BBS에서 탈출해 간판 집에 취직했다.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분이 하는 계림동 변두리의 ‘청룡사’였다. 주인이 참 따뜻한 분이었다. 한동안 거기서 기초를 배워 광주 중심거리인 충장로 4가의 ‘근대공예사’로 옮겼다. 광주에서 알아주던 간판 집이다. 관공서나 유명한 점포의 멋있는 간판은 도맡아 했다. 청룡사에서 월급을 1500원 받았는데 옮기니 7000원을 줬다. 100원짜리 지폐로 받으니 봉투가 두툼했다.

주인은 일본에서 자라고 일을 배운 사람이었다. 습성이 매우 독특했다.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노는 꼴을 못 봤다. 움직임이 없으면 안 됐다. 부지런할 것을 강조했다. 일없으면 붓을 빨라고 했다. 빨면 입술 사이에 털을 물어 가지런히 정돈해 말리도록 했다. 건성으로 일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워낙 섬세해서 대충 해놓으면 반드시 찾아냈다. 대답을 잘하라는 것도 가르쳤다. 아무리 감정이 상해 있어도 대답은 하라고 했다. 그만큼 곁에서 일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함께 일하던 선배 둘이 많이 보살펴줘서 어려움을 견디며 만 5년을 일했다. 거기서 몸에 밴 습성이 평생의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음식업을 하면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중앙일보

주꾸미 무침. 익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몸통 부분은 따로 익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주꾸미 몸통을 먹통이 터지지 않게 조심해 자르는 ‘고운님’ 주인 정춘근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77년 추석 때 고향 친구를 만났다. 대구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친구는 어떻게 사는지 물었다. 간판 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더니 “사람은 배워야 한다. 내가 도와줄 테니 대구로 와라. 낮에 일하고 저녁에 내가 공부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친구 따라 대구로 갔다. 계성고등학교 옆 간판 집에 취직을 시켜줬다. 숙식은 간판 집 옥탑방에서 했다. 친구는 하굣길에 간판 집 앞 독서실에 와서 공부를 가르쳐주고 집으로 갔다.

고입·대입 검정고시 4개월 새 내리 합격

그렇게 고입 자격 검정고시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철 지난 ‘선데이서울’을 봤다. 5월 청소년의 달 특집으로 기획한 영등포 일대의 주경야독(晝耕夜讀) 산업체 부설학교 기사가 눈에 띄었다. 가족이 있는 광주로 가서 그런 곳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동의를 구한 뒤 주인에게 말했는데 안 보내줬다. 그런다고 멈출 그가 아니었다. 간판 달 때 외줄 타고 시공하던 솜씨를 살려 밤에 외줄을 타고 옥탑방을 탈출했다.

광주로 돌아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동양학원’에 등록했다. 1978년 4월 고입 자격, 8월에 대입 자격 검정고시에 연달아 합격했다. 그동안에도 ‘근대공예사’에서 일을 했다. 예전에도 잘 보살펴주던 두 선배 덕이었다. 1978년 초에 입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학력이 국졸이라 ‘방위’ 판정을 받았다. 검정고시에 합격하자 고졸이 돼 재검 통보가 왔다. 이번엔 ‘현역 입영대상’ 판정이 나왔다.

입영통지를 기다리는 동안엔 간판 일을 계속했다. 광주의 5월도 그렇게 맞았다. 직장 ‘근대공예사’는 충장로 4가 45번지 파출소 건너편에 있었다. 시위가 벌어지면 가까운 중앙로에 나갔다. 당시 중앙로는 도로포장을 하려고 쇄석을 깔아놨었다. 시위하다가 군인들에게 밀리면 도주해 간판 집으로 들어가고, 시위하러 또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하는데 어느 날 총소리가 들렸다. 시위는 소강상태가 됐지만, 시민군이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시내 곳곳에서 소규모로 산발적 시위가 벌어졌다. 집에 가니 어머니가 거리의 젊은이는 다 잡아간다 하니 출근하지 말고 어디 숨어있으라고 했다. 집이 조선대 근처여서 경계가 더 삼엄했다.

중앙일보

지난 겨울 유난히 귀했던 참꼬막.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참꼬막무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광주항쟁 기간엔 지프 타고 유인물 뿌려

보육원에서 나온 친구 남매가 사는 방으로 피신했다. 광천동 현재의 광주종합터미널 근처였다. 피신한 친구 5명이 모여 모두 7명(여자가 2명)이 함께 지냈다. 그 당시 YMCA 인쇄실에서 유인물을 만드는 사람이 보육원에서 친구와 함께 살던 친한 형이었다. 그 형이 부르더니 만들어준 인쇄물을 주며 외곽지역에 뿌리라고 했다. 지프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흘간 했는데 어느 지역에서 총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운전하던 사람이 “엎드려”하고 소리쳤다. 차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영화에서 본 것처럼 180도 회전하더니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 뒤로는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물들인 군복을 입고 다녔는데 어디서 챙겼는지 윗옷 가슴주머니에 카빈 실탄 5발을 기념 삼아 넣고 다녔다.

사태가 강제 진압된 후 군인들은 집집이 돌아다니며 젊은이를 찾았다. 젊은 남자 5명이 모여 있는 걸 군인들은 연행하려 했다. 실탄을 들키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군인들이 끌고 가려 하자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길을 막고 계엄군들에게 악을 쓰듯 소리쳤다.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밥도 굶으며 있던 죄 없는 아이들을 왜 잡아가냐”고. 군인들은 그냥 물러갔다. 뒤에 알아보니 실탄은 친구 여동생이 세탁하면서 버렸다고 했다. 이후엔 출근할 때 학생처럼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간판 작업복 입고, 손에 페인트 묻히고 다녔다.

중앙일보

감태지. 매생이와 파래 사이의 해조류인 감태로 김치처럼 담가 먹는 음식은 전남 남해안 출신에게는 추억의 음식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80년 10월 8일 벌교 병력으로 춘천 103 보충대로 입대했다. 자대배치 전날 호출이 와서 가보니 “눈이 안 좋다”며 귀가 조처를 내렸다. 지금도 눈이 나쁘지 않은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과 차트가 바뀐 게 아닌가 싶다. 광주로 돌아와 세 번째 신검을 받게 됐다. 이번엔 왠지 군대에 가기 싫었다. 아버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사촌 형이 당시 광주에서 힘 좀 쓰고 있었다. 부탁했더니 ‘징집면제’가 됐다. 바로 민방위대에 편성됐다.

군대 갔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귀가조치

그 무렵 간판 집 형이 제주도에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1981년 한 해를 제주도에서 보냈다. 다음 해 광주로 돌아와 ‘1·2광고’라는 간판 집을 차려 2년 운영했다. 생애 첫 사업 경험이었다. 1984년에는 간판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사업을 접고 친형이 운영하던 충장로 음악감상실 ‘타임’의 관리를 맡았다. 그해 결혼도 했다. 이미 돌 된 아들이 있었다.

늦깎이 86학번으로 광주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개방대학이어서 나이 든 학생이 많았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다.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에 참여했다. 3학년 1학기에는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했다. 서울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들떠있던 1988년 2학기부터 과도기간을 포함해 3학기 동안 그 대학 제5대 총학생회를 이끌었다. 유례없는 장기집권(?)으로 “전OO보다 더 징한 총학생회장”이라는 농담까지 들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그가 이끄는 광주대 총학생회도 전남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남대협)에 이어 1989년 3월 출범한 제3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임시의장 임종석 현 청와대 비서실장)에 참여해 연대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학생운동권 화두는 민주화에 이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이었다. 그해 문익환·황석영·임수경·문규현이 잇따라 방북하고, 광주에서는 익사로 발표된 조선대 학생 이철규 의문사 진상규명 요구 투쟁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중앙일보

새조개와 주꾸미를 데쳐 낸 국물로 끓인 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죽에 곁들여 먹은 묵은지. 묵은지는 2000년대 들어 유행하는 김치인데 사회경제적 규명이 필요한 음식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늦깎이로 간 대학에서 총학생회장 3학기

학생운동이 역사의 중요 동력이던 때에 광주지역 한 대학의 대표였으니 그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알 만하다. 게다가 그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장이었고, 2개 사업장의 업주였다. 전대협 3기 멤버 중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유로 그는 좌장이 됐다. 현재 그 동문회에서도 좌장을 맡고 있다.

1990년 2월 대학을 졸업했지만 뒤늦게 학구열이 불타 1992년 광주대 사진학과에 학사편입 했다. 보통은 3학년으로 들어가지만 더 배우고 싶어 2학년을 자원했다. 늦은 나이에 실기 중심으로 공개평가를 하는 수업이 많아 젊은 학생들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2년을 다니고 등록을 포기했다.

1993년 ‘한국관’ 동업에 참여하면서 그는 음식장사가 천직이라는 걸 알았다.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에 함평 학교면 학다리 도축장에서 가서 방금 잡아 김이 펄펄 나는 소고기를 실어 나르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좋은 고기 내면 손님들이 맛있다고 좋아하고, 그걸 보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재미로 더 열심히 했다. 오늘날 ‘고운님’이 있기까지 그를 밀어준 추동력은 그 기쁨이었다.

"가업 대물림할 국수나 국밥 집 하고 싶어"

하지만 환갑을 1년 앞둔 그는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제는 해산물 중심의 ‘고운님’ 스타일에서 떠나고 싶다. 인건비·재료비 압박이 너무 크다. 일본처럼 작아도 음식 맛으로 대물림하는 가업(家業)을 했으면 좋겠다. 국밥이나 국숫집을 하고 싶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모바일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카카오 플러스친구] [모바일웹]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