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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품위있는 삶’에 대해 묻는 청춘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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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소공녀


한겨레

주인공 미소는 ‘프로 가사도우미’다. 그는 일당 4만5천원으로는 야금야금 오르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차, 담뱃값이 2000원 상승되는 결정타를 맞게 된다. 결국 그는 담배와 집, 둘 중에서 집을 포기한다. 광화문시네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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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 4만5천원 청년 가사도우미
월세 감당 못해 카페에서 새우잠
위스키 한잔, 담배 한모금 위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포기 안해

‘생존 위해 즐거움 버리지 않겠다’
이 시대 청춘들의 당돌한 선택에
기성세대는 ‘염치없는’ 일이라 지적
과연 어떤 방식의 삶이 정답일까?


도입부 한글 제목 밑에 굳이 ‘Microhabitat’이라는 영문 제목을 적어 넣은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영화 <소공녀>에서 서식지(habitat)와 그것의 미소(micro)함은 핵심이다.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없어 보이거나 없는 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가혹한 이 거대도시의 한가운데에서 ‘그냥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기면서 살면 안 돼?’로 요약되는 나름의 마이크로한 라이프스타일을 지키려는 인물이다.

이 설정을 보고 어떤 독자께서는 비고 모텐슨 주연의 영화 <캡틴 판타스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여섯 명의 자녀들과 함께 속세를 완전히 떠나 원시림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면서, 플라톤부터 양자물리학까지 인류문명의 핵심을 자녀들에게 빠짐없이 전수하고, 권위주의와 위계적 억압 없는 이상가족을 추구하며 사회학자 노엄 촘스키를 기도문처럼 암송하는 <캡틴 판타스틱>의 전투적(또는 저항적) 미니멀리즘과는 달리 <소공녀>의 미니멀리즘은 훨씬 방어적이다. 그리고 소박하다.

그는 왜 담배 대신 집을 포기했을까?

그렇다면 미소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떤 식으로 마이크로한 것일까? 우선 그에게는 집이 없다. 하지만 그는 길 ‘노’, 머물 ‘숙’을 하지는 않는다.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그는 ‘프로 가사도우미’다. 일당 4만5천원으로는 야금야금 오르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던 와중에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담뱃값이 2000원 상승되는 결정타를 맞게 된다. 결국 그는 담배와 집, 둘 중에서 집(!)을 끊기로 결심한다. 30대 이상 성인이 2명 이상 모이는 자리에서 부동산과 관련된 뭔가를 한 차례라도 거론하지 않으면 실정법 위반인 듯한 현재의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판타지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의 자칭 장르명도 ‘청춘 판타지’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주인공 미소는 자신을 재워줄 옛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는 순례를 시작하게 된다.

‘판타지’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이 영화가 현실적 고난을 거의 차력에 가까운 동화적 상상력으로 극복하는, 예컨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풍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소공녀>는 집도 돈도 없는 삶이 마주치게 되는 각종 열악하고 꿀꿀한 현실을 후처리 없이 원본 그대로 보여주거나 때로는 더욱 해상도를 높여 보여준다. 일례로 이 영화에서는 곰팡이 슨 방이 자주 등장한다. 친구 ‘현정’(김국희 분)이 시부모님에게 얹혀사는 좁고 낡은 연립주택의 골방은 누수 자국과 곰팡이로 얼룩진 벽지가 들떠 있다. 이어 미소가 집을 구하기 위해 보게 되는 산동네 꼭대기의 가장 싼 옥탑방은 인간보다는 곰팡이균의 서식지에 가까운 모습이다. <소공녀>가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은 미소의 라이프스타일에도 적용된다. 미소는 잘 곳을 찾지 못한 날에는 카페 의자에 앉은 채 잠을 자고, 공용화장실 핸드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등 초저예산적 생존방식을 구가한다.

자,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중력이 그닥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다.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일도 꾸준치 않고, 벌이도 많지 않고, 잘 곳도 녹록잖다. 더구나 그가 살아가는 곳은 다름도 아닌 서울이다. 하지만 <소공녀>는 이 중력을 중화시키는 자신만의 반중력 물질들을 가지고 있다. 바로 ①코믹함 ②온기 ③품위, 그리고 ④사랑이다.

우선 <소공녀>의 코믹함은 앞서도 말한 동화적 상상력이 아닌 날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서 등장한다. 이러한 면모는, 미소가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 아줌마(박지영 분)와 산동네 이집 저집을 다니는 장면에서 가장 분명하게 관찰된다. 고도에 정비례, 집세에 반비례하여 집 상태가 점점 열악해지던 중 마침내 등장하는 옥탑방은 관객으로 하여금 절로 탄식을 흘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배우 박지영의 능숙한 연기로 다연장 발사되는 닳고 닳은 부동산 아줌마의 각종 말도 안 되는 설레발들이 안기는 코믹함은, 관객이 느끼는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완충하기에 충분하다. 보통은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코믹 음악이나 ‘은행 광고’ 같은 행복이 넘쳐 흐르는 연출로 얻으려다 실패하곤 하는 그 효과를, 전고운 감독(겸 각본)은 관찰력과 재치있는 대사를 통해 얻고 있다.

그리고 영화가 깔고 들어간 묵직한 중력을 중화시켜주는 <소공녀>의 이러한 코믹함은, 미소라는 캐릭터, 그리고 영화 전체가 바탕에 깔아두고 있는 ②온기와 선의로 인해, 공허한 재치 과시나 냉소로 흐르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도 역시 인공첨가물은 최대한 배제되고 있다. 비좁은 시부모님 댁에 얹혀살며 생활에 지친 친구 ‘현정’(김국희 분)의 집에서 하룻밤 묵은 미소가 해놓고 나오는 ‘엄마표 반찬’들이나, 인생의 덫에 발목이 물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고용주 ‘민지’(조수향 분)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대사 “밥은 먹었어요?”를 건네며 지어주는 밥은 그저 밥그릇과 밀폐용기에 담긴 그냥 집밥에 그냥 집반찬이다. 하지만 각종 화려한 먹방들의 과시적 비주얼이 전혀 없는 그 음식의 소박한 온기는, 최대한 많이 껴입은 옷 위에 보풀 잔뜩 인 목도리를 두르고 캐리어에 세간들 질끈 묶어 끌고 다니는 미소의 모습 위에, 자연스러운 품위를 입힌다.

맞다. 품위. <소공녀>는 기본적으로 ③품위에 대한 영화다. 미소는 금전출납기에 넣어둔 일당을 매일매일 세어보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만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인 ‘아담한 위스키 바에서 좋은 스카치 한 잔’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긴, 담배 대신 집을 끊은 그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장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 타인의 생활공간에 윤을 내주고, 밥과 반찬의 냄새로 생활의 향기를 얹어주는 일이기 때문에 ‘가사도우미’를 직업으로 택한다. 미소는 생존을 위해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현정’의 대사처럼) “인생 자체에 대해 예의가 없”는 일, 즉 품위 잃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부잣집에 시집간 선배 ‘정미’(김재화 분)의 말처럼 미소의 담배와 위스키 한 잔은 “참 염치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돈 없이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나 자신부터를 지킨단 말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 누구 하나 그리 쉽게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계속해서 답을 유보하는 바로 이 두 질문 사이의 무게중심에 ④사랑이 있다. 영화표 확보를 위해 헌혈을 하고, 잃은 철분을 회복하기 위해 순대를 먹고, 파인 다이닝 대신 떡꼬치를 들고 햇볕 화사한 거리를 걷는다. 그들은 사랑스럽다. 하지만 영화는, 세상이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음을 잘 알고 있고, 그 가능성을 굳이 억지 해피엔딩으로 외면해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캐릭터들을 현실이라는 시계태엽장치로부터 건져내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시 품고 있을 연민과 애정에도 불구하고.

간편한 해피엔딩 대신 ‘숙제’를 남기다

그 서글픔은 장황한 설명이나 쥐어짜는 감상 없이 남자친구 한솔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생명수당’이라는 단어나, 회사에서 ‘기념으로 뽑아준’ 정장 롱코트 아래에 여전히 신고 있는 흰색 운동화(이 장면에서 마지막 순간에야 운동화를 드러내주는 화면구성은 무척이나 적절했다) 등을 통해 그야말로 짧고도 굵게 드러나는데, 그렇게 <소공녀>는 시한부 선고나 기억상실이나 출생의 비밀 없이 근래 등장한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된다.

영화는 ‘돈이라는 중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간단히 공중유영해버리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이 매력적이고도 메마른 도시, 서울의 풍경을 말없이 빠르게 훑는 시퀀스로 우리 속에 섞여 있을지도 모를 미소의 모습을 찾게 한다. 그리고 질문을 남긴다. 얄팍하고 손쉬운 해피엔딩 대신 끝내 질문을 풀지 않은 채 숙제로 남겨두는 것, ‘사랑하는 것과 삶을 동시에 지킬 수는 없을까’라는 그 쉽지 않은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는 것. 그것은 영화가 자신의 주인공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다. 또한, 그런 그와의 조우를 마친 뒤 다시 청춘 판타지 아닌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관객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그렇게 미소와 영화는 자신에게 걸맞은 품위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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